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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遷位 기행 .5 최진립

碧 珍(日德 靑竹) 2010. 8. 21. 11:56

[不遷位 기행 .5] '진짜 청백리' 잠와 최진립
 일흔에 전쟁터 나가 戰死…청렴·겸손 겸비한 조선武臣
 (불) (천) (위)
 글씨 : 土民 전진원
 무과출신이 종3품 공조참판까지 올라
 인품에 반한 두 종 함께 싸우다 殉死
 ◇ 최진립 약력
   
잠와 최진립이 배향된 용산서원 (경주 내남). 용산서원 현판은 당대의 명필이자 서예이론가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잠와 최진립이 배향된 용산서원 (경주 내남). 용산서원 현판은 당대의 명필이자 서예이론가인 옥동 이서의 글씨다.
모든 측면에서 다 훌륭한 인물은 정말 드물다. 사회적으로 유능한 인물인데도 가정적으로는 미흡한 이가 있는가 하면, 청렴과 겸손을 갖췄지만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용기가 부족한 이들도 있다. 조선시대 무신으로 경주최씨 종가의 불천위 인물인 잠와(潛窩) 최진립(1568~1636)은 그 기록을 훑어 보니, 보기드물게 모든 면에서 사표가 될 만한 인물이었던 것으로 다가온다.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잠와가 별세한 해, 병자호란으로 왕이 남한산성에서 청나라 군사들에 의해 포위당하게 됐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가 왕의 밀지를 받고 근왕(勤王)을 위해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향하면서, 다른 장수에게 대신 군사를 거느리게 하고 당시 공주 영장(營將)이던 잠와에게는 연로하기 때문에 뒤에 처지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용인 험천에 이르러 보니 잠와가 진중에 벌써 와 있었다. 관찰사는 잠와를 보자 "연로한 최공은 전장에 나가기에 마땅하지 않아 직산으로 돌아가게 했는데, 어찌 여기에 왔소"라며 물었다. 그러자 그는 "내 나이 늙어 결코 영장에는 합당치 않아 다른 사람이 대신하게 함이 옳소. 하지만 임금께서 포위를 당하셨고, 주장(主將)이 전장으로 달려가는데, 내 비록 영장 자리를 떠났다 한들 어찌 물러가리오. 하물며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었으니 주장과 같이 죽으려고 왔소"라고 답했다.

그리고 잠와는 "내 비록 늙어 잘 싸우지는 못할지언정 싸우다가 죽지도 못하겠는가(老者雖不能戰獨不能死耶)"라며 분연히 나아갔으며, 중과부적으로 아군이 밀리는 가운데 "내 죽을 곳을 얻었도다(吾得死所矣)"라며 장렬히 싸웠다. 결국 패색이 짙자 주위 사람들을 둘러보고 "나는 여기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죽을 것이지만, 너희들은 나를 따르지 않아도 된다" 라고 말한 뒤 마지막까지 활을 쏘며 분전하였다. 나중에 그의 시체를 찾으니 화살촉이 수 없이 박혀 고슴도치털과 같았다고 전한다.

그의 충직한 면모를 알게 하는 사실이다. 최후의 모습만이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는 평생동안 무신으로서, 공직자로서 아무나 할 수 없을 정도로 엄격한 삶을 살았다.


◆"적에게서 들어온 관물 어찌 받으리오"

체찰사(體察使 : 사령관) 이덕형이 영남지역을 순행하며 공로가 큰 장수나 병사에게 포상할 때, 잠와에게 좋은 말을 한 마리 주자 "적에게서 들어와 관물(官物)이 된 것인데 어찌 받으리오"라며 거절했다. 체찰사는 크게 감탄했다. 또한 이 체찰사를 보좌해 영덕에 이르렀을 때 현감이 털부채 등을 선사하자, 받아서는 다시 자리 위에 두고 돌아갔다.

잠와의 이런 모습은 충청도 마량진 첨절제사(僉節制使) 시절에도 잘 드러난다. 청렴하게 군사력 확충에만 몰두하는 그에 대해 사람들은 '가을 털끝만큼도 비리를 범한 바가 없고 관사 안에 첩을 두지 않으며, 슬하의 두 아들이 칡신으로 서리를 밟으니 이런 장수를 본적이 없다'고 칭송했다. 이런 그를 관찰사가 현감 박유충을 시켜 그 실상을 파악하게 하였더니, 박유충이 안문기(按問記)를 지어 '진짜 맑은 이(眞淸者), 억지로 맑은 이(强淸者), 가짜 맑은 이(詐淸者)가 있다. 세상에 청렴으로 이름 난 자들 모두 거짓 아니면 억지인데, 잠와만이 이와 다른 진짜 청백리'라고 칭송했다.

그가 무과 출신임에도 이례적으로 종3품 고위직인 공조참판에 오른 것도 그의 능력과 청렴함이 두드러진 덕분이다. 당시 기록을 보면 '최진립은 무인으로서 몸가짐이 청근(淸勤)했기 때문에 이 직을 제수한 것'이라고 적고 있다. 이 시대 공직자들이 귀감으로 삼을 일이다.


◆서모에 대한 극진한 효행

효행도 남달랐다. 서모의 상을 당하자, 잠와는 그리는 정을 못이겨 조카를 시켜 한강(寒岡) 정구 선생에게 예법을 물었다. 어려서 친어머니를 잃고 서모의 돌봄으로 다행히 잘 성장해 그 은덕이 낳은 어머니와 다름 없었는데 갑자기 그 상을 당해 망극한 애통이 어떻겠느냐며, '예법대로 따라야 하겠으나 양육한 정으로 말한다면 아무래도 그렇게 하지 못하겠는데, 베띠(布帶)·베옷(布衣)으로 기년(朞年:만 1년)을 마쳐도 될까, 신주(神主)를 만들어 제사를 모시고자 하는데 신주 분면(粉面)에 서모 강성(庶母姜姓)으로 쓰면 거리낌이 없을까' 등을 질문했다.

한강이 답하기를 '신주를 만들어도 무방한데 만약 허물 없는 좋은 사람이라면 분면에 씨(氏)자를 써도
잠와와 함께 순사한 충노 옥동과 기별을 기려 세운 비석과 비각.2
잠와와 함께 순사한 충노 옥동과 기별을 기려 세운 비석과 비각.
잠와종택인 충의당(경주시 내남면 이조1리). 대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3
잠와종택인 충의당(경주시 내남면 이조1리). 대문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잠와종택 사당 내의 잠와 신주 감실.4
잠와종택 사당 내의 잠와 신주 감실.
의리에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씨자는 여자의 통칭으로 귀천을 가리지 않고 다 통해 쓰지만, 씨자를 씀이 미안한 듯하면 성(姓)자로 쓰는 것도 좋을 것'이라고 했다.

당시에는 첩 출신 등 계급이 낮은 부인에게는 씨자 대신 성자를 썼다. 신분 구별이 철저하던 당시에 이처럼 예법을 물어가면서까지 서모에 대한 정을 표현했던 일은 그의 인품과 사상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면모라 하겠다. 잠와의 차별 없는 인간애는 그와 함께 순사한 두 노비 이야기에서 더욱 드러난다.


◆평생 그림자처럼 따랐던 두 종

잠와를 평생 그림자처럼 따르며 진심으로 도운 노비가 있었다. 옥동(玉洞)과 기별(奇別)이다. 임진왜란 때 잠와가 의병을 모아 왜적을 무찌를 때 팔을 걷고 앞선 이들이며, 경흥부사(慶興府使) 시절 장자 상을 당했을 때는 수천리 길을 달려 슬픈 마음을 이들이 대신 전했다.

병자호란 때 마지막 순간 따르는 자에게 후퇴를 명령하고 옥동과 기별에게 "나는 마땅히 전장에서 죽으리니 너희들 중에 나를 따를 사람은 이 옷을 받아 입어라"하고 옷을 벗어던지자, 기별이 울면서 입고 "주인이 충신이 되는데 어찌 종이 충노가 되지 않겠습니까"라고 한 뒤 함께 싸우다 순사했다. 후에 잠와의 시체를 찾았을 때 그들의 시체도 곁에 있었다.

잠와가 그들을 평생 인간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면 그들이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후손들은 두 종의 충심을 기려 잠와 불천위제사 때 이들의 신주도 함께 모셔 제사를 지내며 지금까지 기리고 있다. 아름다운 이야기다. 종은 인간 취급도 하지 않던 시대의 일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잠와 불천위' 특징은

忠奴 옥동과 기별 제사도 함께 지내

헌관은 따로 정하고 초헌만 올린다

잠와는 사후 15년만인 1651년에 나라에서 정무(貞武)라는 시호를 내리고, 함경도 경원부 사람들 요청으로 1686년부터 부사가 사당을 세우고 위패를 봉안했다는 기록 등이 있는 만큼 불천위는 4대 봉사(奉祀)가 끝나기 전에 인정된 것으로 보인다.

1699년 경주 용산 아래(내남면 이조3리, 지금의 용산서원) 마을 선비와 주민들이 사당을 건립했고, 1700년 겨울에 잠와 위패를 봉안했다. 1711년에 유림의 소청을 받아들여 나라에서 사당 묘액을 숭렬사우(崇烈祀宇)로 내려주었다. 사당 칭호는 대제학 김진규가 정했고, 글씨는 찰방인 옥동(玉洞) 이서가 썼다. 유림의 의논을 거쳐 서원 이름은 용산서원(龍山書院)으로 정했다. 용산서원 편액 또한 이서가 썼다.

불천위 기일 제사와 별도로, 병자년이 되면 나라에서 특별히 날을 잡아 종택에서 제사를 지냈다. 병자호란 후 첫 병자년인 영조 32년(1756) 5월22일(음력)에 관원을 종택 가묘에 보내 제사를 지내게 했으며, 이후 병자년이 될 때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이는 조선 말까지 계속됐다.

잠와 불천위 제사(음력 12월27일)는 자시(子時)에 지내며, 요즘 참석 제관은 50여명이다. 잠와종가 불천위 제사의 특징은 충노(忠奴) 옥동과 기별의 제사도 함께 지내는 점이다.

잠와 불천위 제사를 마친 뒤, 두 충노의 신주를 제상 위에 놓고 종손이 촛불을 들어 충노 위패를 비추는 가운데 제관들 모두 절을 한다. 술을 올리는 헌관은 따로 정하고, 초헌으로 마친다. 1998년에는 충노 불망비(不忘碑)와 비각을 세워 기리고 있다. 그리고 잠와 신주는 가묘(家廟)에, 충노 신주는 사랑채(제청)에 안치하고 있다.

종에 대한 불천위 제사는 문중에서 나중에 결정해 지내게 된 것으로 본다는 것이 종손 최채량씨(77)의 설명이다. 최씨는 "예전에는 종의 불천위 제사에 대해 욕을 많이 했다는데 최근에는 종도 사람 취급했다며 오히려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한다"고 들려줬다.


△1568년 경주 출생 △1592년 임진왜란 때 아우 계종과 의병 일으킴 △1594년 무과 급제 △1607년 오위도총부도사 △1614년 함경도 경원도호부사 △1630 가선대부 공조참판 △1637년 자헌대부 병조판서 추증 △1651년 시호 정무(貞武: 청백하여 절개를 지킴을 貞이라 이르고, 적을 억누르고 모욕을 막음을 武라 이름), 청백리에 오름 △ 1700년 용산서원 배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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