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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遷位 기행 .6 권벌

碧 珍(日德 靑竹) 2010. 10. 13. 17:45

[不遷位 기행 .6] '절의의 표상' 충재 권벌
 숱한 士禍속 꿋꿋이 절개와 의리 지킨 올곧은 선비
 글씨 : 土民 전진원
 '公'이라면 어떤 사안이라도 임금에 직언
 결국 士禍에 휘말려 파직당한 후 낙향
 늘 수신 지침서'근사록' 곁에 두고 읽어
 
충재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는 동곳떡을 쌓고 있는 모습. (충재종가 제공)
충재 불천위 제사 때 사용하는 동곳떡을 쌓고 있는 모습. (충재종가 제공)

조선시대 선비들이 가장 중요시했던 수신 지침서로 소학과 더불어 근사록(近思錄)이 있다. 중국 송나라 때 유학자 주희와 여조겸이 편집한 책으로, 앞선 유학자들의 글 가운데 학문에 필요한 요점과 일상생활에서 반드시 실천해야 할 내용을 주제별로 모아 놓았다. 책 이름 '근사(近思)'는 '가깝고 쉬운 것에서부터 생각해본다'라는 의미다. 논어에 '널리 배우지만 뜻은 돈독하게 하고 간절하게 질문하면서 가까운 일에서 생각해보면, 인이 그 속에 들어있다(博學而篤志 切問而近思 仁在其中矣)'라고 한데서 가져왔다.

근사록의 초점은 유학의 핵심인 사랑(仁)의 원리는 가깝고 쉬운 일상의 일들 안에 들어있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근사록을 누구보다 각별히 수신의 지침서로 삼아 평생 손에서 놓지 않았던 인물이 충재(沖齋) 권벌(1478~1548)이다. 수차례의 사화로 격변하는 소용돌이 정세 속에서도 그는 그 가르침대로 올바른 일이라면 어떠한 경우라도 회피하지 않고 실천하며 절의를 관철하는 삶을 살았다. 후덕한 면모 속에 '죽음으로도 뺏을 수 없는 절의'를 지녔던 대표적 인물이었다. 그는 평생 흐트러짐 없는 절의 정신과 '공(公)'에 입각한 신념으로 일관한 삶을 살았다.


◆'公'을 생명처럼

충재는 벼슬길로 나선 이후 오랜 관료생활 동안 줄곧 '공(公)'을 우선시하며 행동했다. 1512년(중종 7) 8월 충재는 경연(經筵: 임금에게 경서나 역사를 강론하는 자리)에서 "무릇 시종(侍從)하는 신하는 생각한 것이 있으면 반드시 말하는 것이니, 말하는 것이 만약 '사(私)'라고 하면 그르거니와 그것이 '공(公)'이라면 어찌 꺼려하며 말하지 않겠습니까. 임금은 마땅히 악한 것은 숨기고 착한 것은 드러내야 하는 것이니, 착한 말은 써주고 악한 말은 버리는 것이 마땅합니다"라고 역설했다.

그는 공에 해당하는 것이면 어떤 사안이라도 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아울러 그는 임금 역시 임금 자리를 공으로 여기는 군주관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1518년(중종 13) 6월 "요순은 천하를 만백성의 소유로 보고 자기 자신을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이었습니다. 임금이 그 자리를 천하의 공기(公器)로 여긴다면 그의 용심은 넓게 두루 미쳐서 백성에게 은혜를 입힐 수 있지만, 만약 천하를 자기의 소유물로 여긴다면 사사로운 일만을 생각하고 또 욕심이 일어나게 되어 자신을 위하고 욕심을 채우는 일만 하게 됩니다. …말세의 임금들은 그가 있는 지위를 자신의 사물로 여긴 나머지 조금만 급박한 일이 있을 것 같으면 사람들을 모조리 죽여 없앴는데, 이는 모두 그 사심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라고 했다.

그는 공을 생각한다면 어떤 사안이라도 군주에게 말해야 하고, 옳다고 생각한 바를 꾸밈없이 그대로 말하는 것을 공이라고 간주했다. 그리고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의 안위를 돌보지 않고,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옳다고 믿는 바를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면모를 보였다.

◆오직 義만 추구한 '무쇠 같은 인물'

을사사화 때 병조판서 충재는 1545년(명종 즉위) 8월 중신 회의에서 문정왕후의 위세 속에 대다수 중신들이 처벌이 불가피함을 거론하는 가운데, 홀로 윤임 등을 처벌하지 말고 민심을 얻을 것을 주장했다.

이와 관련, 사신(史臣)이 논평하기를 '당시 사람들은 그들의 억울함을 알면서도 감히 구제하지 못했는데, 권벌만은 이에 맞서 그들에게 다른 마음이 없었음이 명백하다는 것을 힘껏 논계하였다. 충성스러운 걱정이 말에 나타나고 의기가 얼굴색에 드러나 비록 간신들이 죽 늘어서서 으르렁거리며 눈을 흘기는데도 전혀 되돌아보지 않고 늠름한 기상이 추상같았으니, 절의를 굳게 지키는 대장부라 일컬을 만했다'고 적었다.

며칠 후 사화를 일으킨 주요 인물인 정순붕(鄭順朋)이 상소를 통해 충재와 반대되는 입장을 피력하며 충재를 몰아세우는데도, 충재는 그 후 열린 중신회의에서 다시 그들의 무죄를 적극 옹호한 뒤 회의 도중 물러나왔다. 이와 관련 사신은 또 '정순붕의 소(疎)가 이미 올라갔으니 류관 등이 뼈도 못추리게 되어 구제할 수 없는 형세였는데… 권벌은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였으니 대개 머리를 베고 가슴에 구멍을 낸다 해도 말을 바꾸지 않을 실로 무쇠 같은 사람(眞鐵漢)이었다'고 논평했다.

이후 권벌은 결국 파직되어 향리로 돌아갔고, 1546년에는 관직까지 삭탈됐다. 1567년 선조 즉위년에 삼정승의 요청으로 이전의 관직과 품계를 되찾게 됐다.

미수 허목은 '권 충정공(忠定公)은 후덕과 대절(大節)로 유림 학사들이 존경하고 사모하지 않는 이가 없다'고 했고, 문익공(文翼公) 정광필은 '죽음의 어려움이 있더라도 가히 빼앗을 수 없는 절의(有死難不可奪之節)'을 지닌

충재 권벌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면, 낙향해 머물던 1526년에 건립한 청암정(靑巖亭). 종가 서쪽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한 정자로, 주위는 연못과 고목으로 둘러져 사철 아름답다. 미수 허목의 마지막(88세)붓글씨인 '靑巖水石' 전서 현판(작은 사진)이 유명하다.2
충재 권벌이 기묘사화에 연루돼 파면, 낙향해 머물던 1526년에 건립한 청암정(靑巖亭). 종가 서쪽의 거북바위 위에 건립한 정자로, 주위는 연못고목으로 둘러져 사철 아름답다. 미수 허목의 마지막(88세)붓글씨인 '靑巖水石' 전서 현판(작은 사진)이 유명하다.
충재 종가 사당 전경. 다른 종가와 달리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제청을 사당 옆에 별도로 건립해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이 제청이 있는 갱장각이다.3
충재 종가 사당 전경. 다른 종가와 달리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제청을 사당 옆에 별도로 건립해 사용하고 있다. 오른쪽이 제청이 있는 갱장각이다.
충재가 도포 소매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근사록. 보물로 지정돼 있다. (충재종가 제공)4
충재가 도포 소매에 넣어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근사록. 보물로 지정돼 있다. (충재종가 제공)
인물로 평했다. 율곡 이이는 '권벌은 사직을 지킨 신하이며, 그가 계를 올리며 쓴 말은 밝기가 해나 별과 같았다'고 했다.


◆충재와 근사록

충재는 평생토록 근사록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고 한다. 자신이 지닌 책으로 경연에서 중종에게 강의를 하기도 했다.

이황은 충재 행장에서 "평소 글 읽기를 좋아해 비록 관청에 숙직하는 자리에서도 책 읽기를 멈추지 않았고, 성현의 언행이 절실하고 요긴한 대목을 만나면 반드시 아들과 조카를 불러 펴 보이며 반복해 가르쳤다. 늘 말하기를 '학문은 반드시 자기를 위한 것이요 과거시험은 지엽적인 일일 뿐'이라고 했다. 말년에는 더욱 근사록을 좋아해 소매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중종이 재상 등을 불러 후원에서 꽃을 구경하고 각기 즐기면서 취하라고 한 적이 있었다. 공이 부축받고 나간 뒤 궁중의 어떤 이가 작은 근사록을 주웠는데 누구의 것인지를 알지 못했다. 임금이 말하기를 '권벌이 떨어뜨린 것이다'하시고는 명하여 이를 돌려보냈다"고 적었다.

임금이 알 정도로 충재가 근사록을 얼마나 가까이 했는지를 말해 주는 일화다. 이런 일화를 알게 된 영조는 1746년 중앙관직에 근무하던 충재의 후손 권만에게 그 근사록을 가져오게 해 열람한 뒤 새로 간행한 근사록 한질을 따로 하사했고, 정조도 1794년 그 근사록을 본 뒤 어제(御製)서문을 써서 '심경' 한질을 더 하사하며 돌려주는 일까지 있었다. 이 근사록은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고, 보물로 지정돼 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권벌 불천위' 특징은

본편은 시루떡 대신 작은 크기 절편 사용

상투 튼후 꽂는 동곳과 비슷…일명 동곳떡

충재는 1592년 나라에서 불천위로 봉사(奉祀)하라는 '친진부조(親盡不)'의 은전이 나라에서 내림으로써 불천위가 되었다.

불천위 제사(음력 3월 26일)는 종가 안채나 사랑채의 대청에서 지내는 대부분의 다른 종가와 달리, 사당 건물 경내에 있는 별도의 제청(祭廳)에서 지낸다. 제청이 있는 건물인 갱장각(羹牆閣)은 충재의 5세손 권두인이 건립했다. 갱장(羹牆)이란 말은 요임금 사망 후 3년 동안 순임금이 앉으면 담벽에 요임금이 나타나고 밥 먹을 때는 국그릇에 보였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으며, 선현을 추모하는 뜻이 담겨있다.

사당이 정침의 서쪽에 있는 점도 특이하다. 불천위 사당은 보통 정침의 동쪽에 위치한다. 차종손 권용철씨(39)가 어릴 때는 제관이 200~300명이었다고 하나, 요즘은 50여명. 제사는 기일 0시에 시작한다. 단설로 고위 신주만 모시며, 병풍은 옛날부터 글씨가 없는 백병풍을 사용하고 있다.

제수 중 편, 즉 떡(동곳떡)이 특별하다. 불천위 제삿상의 중심 제물인 편은 아랫부분의 본편과 윗부분의 웃기떡으로 이루어지는데, 충재 종가에서는 본편으로 시루떡 대신 작은 크기의 절편을 사용해 만든 동곳떡(상투를 튼 후 풀어지지 않게 머리 위에 꽂는 장식인 '동곳'과 모양이 비슷해 붙은 명칭)을 쌓는다. 절편을 반으로 접고 비벼서 동곳처럼 만들어 사용한다. 굵은 머리 부분은 바깥쪽으로 향하고 가는 꼬리 부분은 안쪽으로 향하도록 둥글게 쌓아올린다.

예전에는 본편을 25켜(부인 제사 때는 23켜)로 쌓았다. 40켜 이상 쌓을 때도 있었다 한다. 지금은 물론 많이 줄었다. 그 위에 청절편, 밀비지, 경단, 송기송편 등 11가지의 웃기떡을 쌓아 완성한다.

동곳떡은 10여명의 집안 할머니들이 하루종일 걸려 완성한다. 그리고 숙련된 노하우가 필요한, 편 쌓는 일은 연로한 송재규 할머니가 담당했는데, 다행히 차종부가 최근 그 노하우를 전수했다고 한다. 지금 제수 준비를 돕는 집안 할머니들 모두 여든 전후여서, 이 할머니들이 별세하고 나면 제수를 제대로 마련하기도 어려울 것이라고 차종손은 걱정하고 있다.   김봉규기자

◇ 권벌 약력             

△1478년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 출생, 본관은 안동 △1507년 문과 급제  △1519년 예조참판 △1519년 기묘사화로 파직, 귀향 △1520년 봉화 닭실에 살 땅을 마련, 서재인 충재와 정자 청암정 건립(1526년) △1545년 우찬성, 원상 △1547년 양재역벽서 사건으로 삭주(평안도) 유배, 1548년 별세 △1568 좌의정 증직 △1570년 시호 충정(忠定: 임금을 섬기는 데 절개를 다했으니 忠이고, 순수한 행실을 지켜 변하지 않았으니 定이라 함) △1591년 영의정 증직, 1등공신록권 하사 △1601년 삼계서원(봉화) 위패 봉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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