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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遷位 기행 .7 손소

碧 珍(日德 靑竹) 2010. 10. 13. 17:46

[不遷位 기행 .7] 송재(松齋) 손소
 文武 겸비…이시애의 亂 평정 공로 적개공신 책봉
 글씨 : 土民 전진원
 청렴 결백·효성 지극한 성품 청백리의 표상
 성주牧使 임기만료 앞두고 백성들 유임 탄원
 
경주(월성)손씨 종택인 '서백당'(경주 양동마을). 양동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1457년 청송 안덕에서 이곳으로 와 창건했다. '송첨(松)'으로도 불리었다. 오른쪽에 가지 일부분이 보이는 향나무는 송재가 550여년 전에 심었다.
경주(월성)손씨 종택인 '서백당'(경주 양동마을). 양동마을 입향조인 손소가 1457년 청송 안덕에서 이곳으로 와 창건했다. '송첨(松)'으로도 불리었다. 오른쪽에 가지 일부분이 보이는 향나무는 송재가 550여년 전에 심었다.
송재(松齋) 손소(1433~84)는 조선 초기 문신으로, 세조 때 반란 평정에 기여한 공로공신이 되면서 불천위에 오르게 된 인물이다. 그에 대한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은 편이다.

◆입재 정종로의 송재 인물평

송재는 사람이 어질고 조심성이 있어 관리의 자격이 있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어버이를 위해 언제나 외직을 자원했으며, 세 고을을 다스렸는데 가는 곳마다 맑고 검소하다는 소문이 났다.

'그 한 때 이름 있던 문장은 비록 전하는 바가 많지는 않으나 금오산부(金烏山賦), 금척부(金尺賦), 조춘시(早春詩), 백록송(白鹿頌), 문장궤범발(文章軌範跋) 등 몇 편의 저술은 이미 모두 시경의 이아편(爾雅篇)과 같이 외울 만하고, 서경(書經)의 뜻 및 증자가 저술한 대학, 자사가 저술한 중용의 글에 의심 있는 곳을 해명한 것은 또한 능히 성현의 미묘하고 깊은 뜻을 발휘해 가히 과거에 응한 문자로만 과소평가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것은 공에게는 아주 지엽적인 부분이다. 공의 집은 대대로 청백으로 이름났으며, 공께서는 또 점필재 김종직 선생과 더불어 도의지교가 되어 상종한 지 30년에 어진 명망이 서로 동등했다. 돌이켜보건대 문헌의 증거가 없어 그 관각(館閣)에서 빛난 문장과 경륜을 문답한 것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 수는 없으나 고을정치 여러 번에 어진 덕화를 펴서 양춘같은 덕택과 빙벽 같은 지조는 뭇사람이 칭송해 마침내 구비(口碑)가 되었다.

그리고 이시애의 난리를 당해 그 흉악하고 미쳐 날뛰는 형세는 마치 봉시장사(封豕長蛇 : 큰 돼지나 구렁이처럼 잔인하고 욕심이 많음을 비유) 같아서 잔인하게도 강토를 짓밟아 도저히 가까이 갈 수 없는 것이 요원의 불꽃처럼 번져 그 누구도 감히 날랜 칼날을 막을 자가 없었다. 공께서 일평생 문묵(文墨)에만 종사하시던 몸으로 분연히 뛰어들어 원수(元帥)의 군막에 참여, 적을 토벌하는 기묘한 전법을 사용토록 해 결국 그 미친 도적떼를 옷소매 한 번 휘두르는 사이에 전부 소탕해 변방백성을 편안하게 하고 종묘사직을 튼튼하게 하였으니 그 꽃다운 공열(功烈)과 거룩한 업적이야 어찌 우주에 빛을 떨치고 천추만세에 이름이 드리워지지 않을쏜가. 공같은 분은 참으로 문무겸전(文武兼全)하여 일평생 국가를 위해 일하신 분이다.'조선 후기 학자인 입재(立齋) 정종로(1738~1816)가 송재에 대해 쓴 글 중 일부다.


◆금오산에 대해 쓴 금오산부

송재가 남긴 작품구미 금오산을 소재로 쓴 금오산부를 소개한다. 21세 때(1453년) 향시에 응시해 지은 글로, 글이 좋아 당대에 회자되고 악보에도 오른 글이다.

'금오산 푸릇푸릇 태허(太虛)에 솟았도다. 옛사람 그 누구가 여기에 살았던고. 나 일찍 일선군에 유적 찾아 이 산비탈에 쉬었도다. 깊은 골짝 맑은 샘물… 옛날 길공(吉公:야은 길재)은 현사(賢士)로서 고려 쇠운 당했건만, 충군애국 일편단심 다른 뜻 전혀 없다. 아홉 번 죽더라도 굳센 절개 변할쏘냐. 아태조(我太祖) 용흥(龍興: 왕위에 오름)하니 홀연히 산에 숨어, 혁명은 운수지만 나의 뜻을 고칠쏘냐. 덕이 있어 왕이련만 두 임금은 못 섬긴다.…우리 임금 여러 번 불렀으나 굳은 절개 그 조정에 불참이라. 마침내 이 산에 늙음이여, 본 뜻은 요동 없다. 충성은 백일(白日)을 관통하고 풍성(風聲)은 만세에 뻗으리라. …나 여기 기구한 골짜기를 지나면서 슬퍼하고, 드높은 봉우리에 반환(盤桓: 머뭇거리며 서성임)한다. 단지 보이는 것은 잔나비 우는 깊은 골짜기요, 학이 우는 높은 산마루로다. 날은 장차 저무는데 시야는 도리어 밝아진 듯, 사고무인(四顧無人) 적적한데 벌목 소리만 정정하다.'



◆문신으로 이시애亂 토벌 참여

1463년 5월, 집현전이 없어진 뒤부터 문사들을 독려할 방법이 없어 인재가 희소해지자 세조는 젊은 문신을 뽑아 본관직을 그냥 두고 예문관에 겸직하여 학업을 익히도록 하는 '겸예문(兼藝文)'을 만들었다. 여기에 손소, 성현, 김유, 홍귀달, 최숙정 등 18명이 뽑혔다. 세조는 손소 등 겸예문 유신들을 불러 주역구결(周易口訣)을 논하기도 했다.

그리고 10월 세조가 양성지, 임원준 등을 불러 당시 모든 학문의 분과를 7개 부문(천문, 풍수, 율려, 의학, 음양, 사학, 시학)으로 나누고, 각 부문마다 당시의 대표적 젊은 문신을 6명씩 배정했는데, 사학문(史學門)에 손소·김종직·김계창·김종련·최숙정·유후복이 포함됐다.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박중선 장군을 도와 이시애를 길주에서 토벌한다. 이로 인해 2등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봉된다(1등 공신은 이준, 박중선, 남이, 강순 등 10명, 2등 공신은 23명, 3등 공신은 12명). 손소에 대한 적개공신 교서 내용이다.

'…너의 공로를 생각하면 감히 포장(褒奬)할 것을 잊겠는가. 그러므로
손소 초상화. 1476년(성종 7년) 나라에서 적개공신 손소에게 하사한 초상화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2
손소 초상화. 1476년(성종 7년) 나라에서 적개공신 손소에게 하사한 초상화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서백당 사당의 불천위 신주 감실. 소박한 형태의 감실 문 중앙에 세로 버팀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3
서백당 사당의 불천위 신주 감실. 소박한 형태의 감실 문 중앙에 세로 버팀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손소에게 성종이 하사한 옥연적. 함께 하사한 산호영·상아도와 더불어 '송첨 3보'라 불린다.4
손소에게 성종이 하사한 옥연적. 함께 하사한 산호영·상아도와 더불어 '송첨 3보'라 불린다.
너를 적개 2등공신에 책봉하여 각(閣)을 세워 초상을 그리고 비를 세워 공을 기록, 그 부모와 처자에까지 벼슬을 주되 두 계급씩 올리고, 자식이 없는 자는 그 생질이나 사위에게 한계급씩 올려주고, 적장자는 대대로 세습하여 그 녹을 빠짐없이 주고, 그 자손들은 정안(政案)에 기록하기를 적개2등공신 손소의 후손이라 하고, 비록 죄를 범해도 용서하며 그 효과는 영세보존된다. 그리고 사환 8명, 노비 10명, 구사(丘史: 공신에게 주는 지방 관노) 5명, 밭 100결, 은 20량, 옷 1습, 말 한 필을 하사하니…'



◆성주 백성들 송재 임기 연장 탄원

39세 때 성주목사로 근무했다. 목사(牧使) 임기 만료를 앞두고, 아전과 백성들이 글을 올려 그 유임을 탄원했다.

'성주고을 백성들이 진정서를 올렸다. 목사 손소의 백성을 사랑하는 정치는 근고(近古)에 없는 바라, 지난 경인년에는 백성을 자식같이 사랑해 온 지역이 굶주림을 면하고 백성들은 부모같이 사랑하더니, 금년에 또 흉년이 되자 마음을 다해 구휼함으로써 백성들이 잘 살았다. 이제 만기가 되어 떠나야 하지만 잉임(仍任: 임기가 다 된 벼슬아치를 그대로 머물게 함)하도록 계를 올리니 상감께서 허락했다.' 정원일기(政院日記)에 나오는 기록이다.

1476년(성종 7년) 임금이 충훈부(忠勳府)에 명령해 모든 공신들의 영상(影像)을 그려 부본은 하사해 본가에 보관토록 했다. 이 때의 손소 영상이 지금까지 전해지며, 보물로 지정돼 있다. 그리고 산호영(珊瑚纓)·옥연적(玉硯滴)·상아도(象牙刀)를 하사한다. 이 세가지는 '손씨 3보' '송첨(松) 3보'라 일컫는데, 지금까지 전해져오고 있다.

송재가 사망(1484년 3월)하자 2개월 후 임금이 사제문을 내려 제사를 지내게 했고, 별세 3개월 후 임금이 태상(太常: 제사와 시호에 관한 일을 맡았던 관청으로 봉상시(奉常寺)를 말함)에 시호를 내리도록 명령, 논의 후 '양민(襄敏: 일로 인해 공이 있으니 襄이요, 옛 것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음이 敏이다)'이라는 시호를 받게 된다.

청백리 경절공 손중돈이 그의 아들이고, 대학자 회재 이언적이 외손이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손소 불천위'특징은

종부가 아헌…수박은 제상에 안올려

소박한 신주감실 門 중앙 세로 버팀목

나라에서 불천위를 받은 송재 불천위 신주(神主)는 이전에는 지금의 관가정 영당(경주 양동마을)에 봉안돼 있었다. 관가정은 송재로부터 분가한 아들 손중돈이 지어(1514년 준공) 살던 집으로, 현 경주손씨 종가인 서백당(1457년 건립·양동마을)으로 종가를 옮기기 전의 종가였다. '중종 22년(1527년)에 경절공 손중돈이 봉작을 받았으며, 송재를 봉사하고 부조묘(불천위 사당)를 관가정 동쪽에 세워 나라에서 내사(內賜)한 영정을 사당에 함께 모셨다'는 기록이 있다. 관가정 영당은 현재 영정만 모시고, 매년 음력 3월15일 차례를 지낸다.

송재 불천위 제사(음력 3월7일)에는 요즘 30명 정도의 제관이 참석한다. 제청은 서백당 사랑채 마루. 당호인 '송첨(松)' 현판 아래 병풍 두르고 제상을 차린다.

제관들이 마루 아래 마당에 자리잡고, 밤 12시30분쯤 제사를 시작한다. 초저녁에 지내자는 것이 종손(손성훈)의 뜻이지만, 아직은 문중 어른들 반대로 예전처럼 지내고 있다고 한다.

불천위 제사의 아헌은 종부가 맡는데, 절(4배)을 할 때 뒷모습을 남자 제관들에게 보이지 않도록 안채와 통하는 문 밖에서 한다. 종부를 비롯한 안제관들은 참신과 사신을 함께 하며 제례가 끝날 때까지 참여한다. 송재가 생전에 수박을 좋아하지 않아 수박은 제상에 올리지 않으며, 다른 특별한 제수는 없다는 것이 종손의 설명이다.

불천위 신주 감실은 박스형태로 매우 소박하며, 문 중앙에 세로 버팀목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형태는 15~16세기까지의 양식이라고 했다. 불천위 신주는 가장 서쪽에, 그 동쪽에 4대조 신주가 모셔져 있다. 사당 앞에는 송재가 심은 향나무 고목이 자리잡고 있다.

서백당은 불천위 제사 축문의 '감소고우(敢昭告于)' 중 '소(昭)'자는 '명(明)'자로 대체, '감명고우(敢明告于)'로 적는다. 송재의 이름이 '소(昭)'이기 때문이다. 김봉규기자

■ 손소 약력

△1433년 청송 출생 △1453년 생원시 합격 △1457년 풍덕류씨와 결혼 △1459년 현량과 급제 △1467년 왕명으로 정로장군 박중선을 도와 이시애 반란 토벌, 적개공신 통훈대부 내섬시정 △1469년 성주목사 △1484년 사망, 시호 양민(襄敏) △1526년 자헌대부 이조판서 증직


손소에게 성종이 하사한 옥연적. 함께 하사한 산호영·상아도와 더불어 '송첨 3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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