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不遷位 기행 .4 김굉필

碧 珍(日德 靑竹) 2010. 8. 4. 16:25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한다" 나이 서른까지 小學 공부만
 [不遷位 기행 .4] '동방道學의 宗師' 한훤당 김굉필
 글씨 : 土民 전진원
 조선 실천윤리의 중심 교재, 그 깊이 꿰뚫고 수양에 몰두
 오늘날 성폭행 등 흉악 범죄, 전쟁선포보다 '소학처방'을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동서원 전경.(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지금 건물은 1605년 한강 정구(1543~1620)가 주도해 세웠다. 사당에는 한훤당이 배향되었고,나중(1678년)에한강이 추가 배향되었다. '도동(道東)' 이라는 이름은 한훤당에 의해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한훤당 김굉필을 기리기 위해 세운 도동서원 전경.(달성군 구지면 도동리) 지금 건물은 1605년 한강 정구(1543~1620)가 주도해 세웠다. 사당에는 한훤당이 배향되었고,나중(1678년)에한강이 추가 배향되었다. '도동(道東)' 이라는 이름은 한훤당에 의해 성리학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요즘 사회를 놀라게 할 흉악한 범죄가 일어날 경우, 정부 당국이 단골 메뉴로 내놓는 대책이 '범죄와의 전쟁' 선포다. 얼마 전 아동 성폭행 사건이 잇따르자 당국이 대책회의 끝에 내놓은 것 역시 '성범죄와의 전쟁' 선포였다. 이것이 최선의 방책일까. 500년 전 조정에서 내놓은 처방은 '소학(小學)'이었다. 소학을 가르쳐 사람들의 윤리의식을 고취시키자는 것이었다.

◆반인륜 범죄 대책으로 제시된 '소학'

'밀양부 풍각현에 사는 백성 박군효가 지난 병자년(1516) 12월24일 대낮에 동네 한가운데서 그 아비의 머리난타해 살해하고는 도리어 흉악한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는 천지간 강상의 큰 변고로, 차마 들을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 동생과 이웃 사람 등이 그를 붙잡았다가 도로 놓아주어 천벌을 면하게 했습니다. 그 당시의 부사 송수(宋壽)는 이미 죽었으므로 죄를 물을 수 없고….'

조선 중종 12년(1517) 12월13일 경상도관찰사 김안국(김굉필 제자)의 장계(狀啓)가 도착했다. 이 사건은 한동안 알려지지 않다가 이듬해 관찰사에 의해 비로소 조정에 보고됐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 사건 때문에 여러가지 논의가 오고갔고, 논의를 거치면서 새로운 사실이 알려진다. 박군효를 잡았다가 놓아준 것으로 돼 있는데, 사실은 뇌물을 받고 사건을 숨기려 했고, 고을의 관리들은 자연사한 것으로 서류를 꾸며 그를 방면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조정으로서는 경악할 사건이었다. 밀양부를 밀양현으로 강등시켰으며, 이 사건에 연좌되어 전가사변(傳家徙邊: 온 집안을 변방으로 강제이주시키는 형벌)을 당한 자가 7명, 3천리 밖으로 유배당한 자가 18명이나 됐다.

박군효 사건을 통해 당시 왕과 신료들은 타락한 민풍(民風)을 어떻게 다시 바로 세울 것이가를 고민하고, 그 대책 중 하나로 논의한 것이 바로 소학을 가르치자는 것이었다. 일상 생활 속 인륜 실천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소학은 조선시대에 기초윤리 교과서 역할을 했다. 당시 가장 많은 영향력을 미친 책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을 만드는 책'이라고 불릴 정도로 중요하게 여겨졌던 소학이다.

◆'소학동자'라 자칭했던 김굉필

우리나라 유학도통을 이은 대표적 성리학자로, 문묘에 배향돼 영원히 추모를 받고 있는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은 소학과는 뗄 수 없는 삶을 살았다. 그가 동방(우리나라) 도학(道學:도덕에 관한 학문)의 종(宗)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소학을 통한 개인의 수양과 실천윤리 확립 덕분이다.

한훤당은 21세때 함양 군수로 있던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문하에 들어가게 된다. 점필재는 한훤당을 가르치면서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었다면 마땅히 소학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며 손수 소학을 건네준다. 이후 소학을 배우고 실천하며, 늘 소학을 행동의 최고 지침서로 삼았다. 한훤당은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며 소학 공부에 몰두했다. 사람들이 나라 일에 대해 물으면 "소학을 읽는 아이가 어찌 대의를 알겠습니까"하고 대답하며, 한결같이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다스리는데 전념했다. 한훤당은 서른이 넘어서야 비로소 다른 글을 읽었다.

그가 지은 '독소학(讀小學)'이라는 시 중에 '글 공부를 해도 천기를 알지 못하더니, 소학에서 어제까지의 잘못을 깨달았구나(業文猶未識天機 小學書中悟昨非)'라는 구절이 있다. 이를 보고 점필재는 '이는 곧 성인이 될 바탕'이라고 언급하기도 했다.

도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 결과는 경서강독이나 문장을 짓는데 그쳤고, 오로지 몸을 닦는 것을 일삼아 참다운 실천으로 공부한 사람은 오직 한훤당뿐이었다는 기록을 퇴계 이황이 남기고 있고, 미호(渼湖) 김원행(1702~1772)은 '한훤당의 학문이 깊어져 덕이 성취되고 행실이 우뚝하게 높아서 한 시대의 종사(宗師)가 된 것도 모두 소학으로 표준을 삼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한훤당은 16세기 조선에 소학을 실천윤리의 중심교재로 삼고자했던 유학 풍조를 정착시키는 주요 동력이 되었고, '후학들이 도학이 바른 학문인 것을 알아서 높이고 숭상하지 않는 사람이 없게 되었으니, 이는 진실로 한훤당의 공이다'(여헌 장현광)는
도동서원 현판.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퇴계가 생전에 도동서원 현판은 꼭 자신이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못 쓰고 별세, 퇴계 글씨를 집자해 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2
도동서원 현판. 퇴계 이황의 글씨를 집자(集字)한 것이다. 퇴계가 생전에 도동서원 현판은 꼭 자신이 쓰고 싶어했는데 결국 못 쓰고 별세, 퇴계 글씨를 집자해 현판을 만들었다고 한다.
한훤당 김굉필의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한훤고택의 사당. 6·25때 다른 종택 건물은 대부분 소실됐으나 이 사당만 남았다. 다른 대부분 종가의 사당과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다.3
한훤당 김굉필의 불천위 신주를 모시고 있는 한훤고택의 사당. 6·25때 다른 종택 건물은 대부분 소실됐으나 이 사당만 남았다. 다른 대부분 종가의 사당과 달리 단청이 칠해져 있다.
한훤당과 부인의 불천위 신주.4
한훤당과 부인의 불천위 신주.
사당 안에 있는, 신주를 넣어 두는 감실이다. 나라에서 만들어 내려준 감실은 5년 전 도난당하고, 지금 것은 그 모양을 본떠 새로 만들었다.5
사당 안에 있는, 신주를 넣어 두는 감실이다. 나라에서 만들어 내려준 감실은 5년 전 도난당하고, 지금 것은 그 모양을 본떠 새로 만들었다.

평가를 받게 된다.

지금도 여전히, 아니 더욱 '소학'이 필요한 시대다. 이 시대에 맞는 소학이, 한훤당 같은 지도자가 절실한 상황이다.

◆한훤당이 남긴, 경계의 글 '한빙계'

남명 조식이 남긴 한훤당의 일화 중 하나다. '선생(한훤당)이 친구들과 같이 거처하면서 닭이 처음 울 적에 함께 앉아서 자신이 숨쉬는 것을 세었는데, 다른 사람은 밥 한 솥 지을 시간이 지나자 모두 세는 것을 잊어버렸다. 다만 선생만이 분명하게 낱낱이 세어 날이 새도록 놓치지 않았다 한다.' 그의 마음 공부, 경(敬) 공부 수준이 어느 정도인지를 잘 말해주는 일화라 하겠다.

이런 그가 자신을 스승으로 삼고자 찾아온 반우형(潘佑亨)에게 주려고, 또한 스스로를 경계하고자 쓴 '한빙계(寒氷戒)'가 있다. '갓을 바로 쓰고 꿇어 앉아라(定冠危坐)' '옛 버릇을 철저히 없애라(痛絶舊習)' '욕심을 막고 분함을 참아라(窒慾懲忿)' '가난에 만족하며 분수를 지켜라(安貧守分)' '사치를 버리고 검소함을 따르라(去奢從儉)' '날마다 새로워지는 공부를 하라(日新工夫)' '말을 함부로 하지마라(不妄言)'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두 갈래로 하지 마라(主一不二)' '마지막을 시작할 때처럼 조심하라(愼終如始)' 등 18개 항목의 글이다.

그는 갑자사화로 죄가 가중돼 유배지인 전라도 순천에서 참수될 때 "신체발부(身體髮膚)는 어버이에게서 받은 것이라 함께 상함을 받을 수 없다"며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죽음을 맞이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 달성 현풍 한훤고택 '國불천위'
사당 정면 안치…제삿술 '스무주' 독특
나라서 하사한 '감실' 5년전 도난 당해

한훤당에 대해 언제 불천위 결정이 있었는지 기록이 전해지지 않고 있으나, 적어도 1615년부터는 불천위 제사가 봉행됐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의 불천위 사당이 1615년 4월(음력)에 현풍현감 허길(許佶)의 감독하에 준공됐다는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한 신주(神主)를 안치하는 함인 감실도 나라에서 만들어 하사한 것이어서 국불천위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감실은 5년 전에 도난당했다.
 
차종손 김백용씨는 당시 사당 문을 열고 감실이 사라진 것을 보는 순간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고 했다. 기와집 형태였던 그 감실은 당시 최고의 기능인이 동원된 듯, 기와 지붕 모양과 문살 등이 정말 정교하게 만들어진 작품이었다는 것. 다행히 신주는 빼내 두고 감실만 가져갔다. 지금 감실은 그 후 비슷한 모양으로 다시 만든 것이다.

한훤당 종가 사당의 신주 위치는 여느 종가와 다른 점이 있다. 보통 불천위를 가장 왼쪽(서쪽)에 모시나, 이 사당은 불천위를 가운데 정면에 안치하고 있고, 4대조 신주는 불천위 신주 앞쪽 좌우에 안치하고 있다. 지금의 종택(대구시 달성군 현풍면 지리)은 6·25때 융단폭격으로 기존의 건물이 대부분 불타버려 새로 지은 건물이다. 솟을대문과 사당 건물만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

불천위 제사(음력 10월1일)에는 보통 40~50여명이 참석한다. 한훤당 부인 제사(음력 8월22일)도 불천위로 지내고 있다. 불천위 제사의 제주로 쓰는 가양주 '스무주'가 독특하다. 스무날(20일) 동안 있다가 뜨는 술이라는 의미다. 재래종 국화를 따서 말린 것, 솔잎, 찹쌀, 누룩 등을 재료로 가을에 담그며 향기가 특히 좋다고 한다. 한훤당 종가는 종보(宗報)에 소학을 시리즈로 연재하는 등 소학의 가르침을 후손들이 본받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 김굉필 약력

△1454년 서울 출생, 고향은 현풍 △1472년 경남 합천(야로) 순천박씨 집 장가 △1480년 생원시 합격 △1497년 형조좌랑 임명 △1498년 무오사화로 평안도 희천 귀양 △1504년 갑자사화로 유배지 순천서 사형 △1517년 우의정 증직 △1575년 시호 '문경(文敬-'文'은 도덕이 있고 들은 것이 넓다는 뜻이고, '敬'은 새벽에 일어나고 늦게 잠자며 깨우치고 조심함을 의미함)' △1610년 문묘 종사(從祀) 허락(정여창·조광조·이언적·이황과 함께) △상계서원, 도동서원 등 16개 서원에 배향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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