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문. 편지글.

理判事判 小考.

碧 珍(日德 靑竹) 2022. 7. 23. 17:03

 

理判事判 小考.

 

 

 

(1).

우리사회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흔히들 쓰는 말 중에, 불교용어를 잘못 이해하고 생각지도 못할 방향으로 쓰이는 말들이 많이 있는데, 그 중하나가 바로 ‘理判事判’ 이란 말이다. 이 말을 그간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번 이상 아니 여러 수차래 사용한 사람도 많을 것이다, 예를 들면 이판사판으로 한판 붙어 보자. 이판사판이니 ...해보자 등 오기나 스스로가 불리하거나 결의를 다질 때 서슴없이 뛰어 나오는 말이라 할 수 있듯이, 말다툼이나 싸움이나 오락 운동 시험 등 사람이 살아가는데 많이 쓰이는 말이다.

 

‘理判事判’ 이란 佛敎 ‘화엄경(華嚴經)’ 의 최고 話頭로 우리 인생에서 어떤 판단할 시 눈에 보이는 事判과 보이지 않는 理判으로, 이는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 을 뜻하고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그래서 理判事判이란 말을 쓰더라도, 그 지니고 있는 참 뜻이라도 소개하고자 하니 우리 佛者들은 물론 많은 분들이 가려 쓰기 바라는 마음이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은 화엄경(華嚴經)에서 유래되었으며 삼라만상을 二分法的 이(理)와 사(事)로 해석한다, ‘이(理)’ 는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의 세계이며, ‘사(事)’ 는 눈에 보이는 현상의 세계를 말한다. 理判事判은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의 합성어로서 理判僧은 참선, 경전 공부, 포교 등 불교의 교리를 공부하는 스님이고, 事判僧은 절의 모든 사무와 재산관리 등 사찰의 살림을 맡아 하는 스님이다, 그러기에 절집(寺刹)에서 理判僧(工夫僧)과 事判僧(山林僧)의 우열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둘의 역할이 없으면 절집이 존재할 수 없다. 흔히 우리가 생활하면서‘살림을 잘한다’라고 할 때 살림이 여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佛敎에서 出家하여 修行하는 승려(僧侶)를 이판승(理判僧)과 사판승(事判僧)으로 나누어 말한다. 즉 理判僧은 이치로 판단하여 참선으로 수행하는 등 오직 수행에만 전념하며 중생제도의 길을 찾는 승려를 말하며, 事判僧 은 사찰에서 모든 일반 사무와 재물에 관한 일을 관장하며 이판승이 수행에 전심할 수 있도록 뒷바라지를 감당하는 승려를 말한다. 

 

그래서 사찰의 조실(祖室)스님이라면, 사판승은 주지(主持)스님이 되는 것이라 표현하면 이해하기 쉬우며, 불교에서는 이판승을 하던 사판승을 하던 득도(得道)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이니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일반인들은 이 용어에 대하여 크게 오해를 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일반 사람들은‘理判事判’이라고 하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앞과 뒤도 가리지 않고 막 덤벼드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아는데 이는 잘 못된 생각이라 하겠다. 

 

아무튼 理判事判은 ‘끝장’ 또는 ‘막다른 궁지’ 에 몰린다는 뜻으로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한 말로, 한자말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이 붙어서 된 말로, 그리고 이 理判과 事判은 佛敎 용어로서 朝鮮時代에 생성된 말로,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표방하였는데, 이는 고려 말에 불교의 폐해가 극에 달하였기 때문에 조선의 건국에 신흥 유학자 士大夫 세력이 대거 참여한 조선은 건국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표방하였다.

 

아무튼 조선 건국으로 불교는 왕조의 교체와 함께 하루아침에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래서 천민계급으로 전락한 승려들 또한 활로를 모색해야 할 시점이 되었는데, 그 하나는 寺刹을 존속시키는 것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佛法의 맥을 잇는 것이었다. 그래서 천민계급으로 전락한 승려 일부는 폐사(廢寺)를 막기 위해 기름이나 종이, 신발을 만드는 제반 잡역에 종사하면서 사찰을 유지하였던 승려를 事判僧, 山林僧이라 하고, 이와는 달리 속세를 피해 은둔하면서 참선과 독경으로 불도를 닦아 불법을 이은 승려도 많았는데 이를 두고 理判僧, 工夫僧이라 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다보니 理判僧과 事判僧, 양자 간에는 자연히 특징이 있게 되었다. 일부 事判僧에는 교리에 어두운 범승(凡僧)이 있었고, 理判僧은 공부에만 치중하므로 불교의 외형적 성장에는 그다지 큰 기여를 하지 못하였기에 양자는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다. 즉 폐사를 막음으로서 사찰의 명맥을 이은 것은 事判僧의 공로이며, 부처님의 혜광(慧光)을 전하고 佛法을 이은 것은 理判僧의 공로였기에, 결국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의 현대 불교가 융성한 것도 이 두 부류의 승려들이 자신들의 소임을 다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고 하겠다.

 

그런데 理判事判의 뜻이 다르게 알려져 부정적 의미로 쓰이게 된 데에는 시대적 상황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조선의 억불정책은 불교에 있어서 최악의 상태로, 승려는 최하계층의 신분이 되었기에 도성(都城)의 출입 자체가 금지되어다. 자연히 당시에 승려가 된다는 것은 막다른 상황에서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이었기에, 理判이나 事判은 그 자체로 ‘끝장’ 을 의미하는 말이 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日帝와 8.15광복 후의 건국초기에도 불교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면서 더욱 더 부정적 이미지로 몰아갔다. 이 두 부류를 정치적으로 이용, 서로 분열 반목케 하여 이판사판의 면목을 그대로 대중에게 심어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아무 것도 모르는 대중은 뾰족한 대안(代案)이 없을 때 무의식적으로 ‘이판사판’ 이라는 말을 쓴다.

 

되돌아보면 ‘理判事判’ 이란 좋은 뜻에서 유래되었음에도 理判事判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밖에 없고, 최악의 경우 둘 중 하나는 될 것이라는 끝장의 말, 포기의 말로 변질한 것은 조선 시대 억불정책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사람은 아무리 어렵고 비상사태가 발생하여도 理判事判이 아니고, 이성적(理性的)이며 긍정적(肯定的)이고 건설적(建設的)이고 미래지향적(未來指向的)이며 대승적(大乘的)차원에서 매사에 대처하고 행하여야 할 것이다.

 

 

(2). - 佛敎에서 ‘理判’ 은 주로 理想世界에 대한 판단, ‘事判’ 은 주로 現實世界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우리가 흔히 잘 쓰는 말 가운데 理判事判이라는 말이 있는데 ‘막다른 궁지에 몰렸을 때’ 나, ‘끝장’ 을 의미하는 말로 별다른 대안이 없는 경우에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 理判事判이라는 말이 佛家에서 유래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며, 한자 불교 용어로 理判과 事判을 함께 묶어 理判事判으로 사용한 말인데 이는 조선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 전한다.

 

조선을 태조 이성계가 건국하면서 고려 말에 佛敎로 인한 사회적 병폐가 너무 심하였기 때문이라고도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조선을 세우는 데 공신으로서 儒學을 공부한 士大夫 집단이 함께하였기에, 국가의 이념으로 억불숭유(抑佛崇儒)정책을 표방하였다고 한다.

 

이판(理判)과 사판(事判)은 조선시대의 불교에서 나온 용어로, 속세와 인연을 끊고 도를 닦는 일을 하는 것을 理判이라고 하며, 그런 일을 하는 스님을 理判僧(工夫僧) 등으로 부르고, 절의 재물과 사무를 처리하는 일을 事判이라고 하며, 그런 일을 하는 스님을 事判僧(山林僧)이라고 한다.

 

佛敎 華嚴經의 최고 話頭로 우리 인생에서 어떤 판단 시 눈에 보이는 事判과 보이지 않는 理判으로, 조선시대 불교 승려의 두 부류인 사판승과 이판승을 합쳐서 부르는 말이며 ‘막다른 궁지’ 또는 ‘끝장’ 을 뜻하고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고 있는 ‘이판사판(理判事判)’ 은 國語 辭典에 따르면 ‘막다른 데에 이르러 더는 어찌할 수 없게 된 지경(판)’ 이라 해석하고 있다. 이 외에도 ‘뾰족한 묘안이 없음을 비유하는 말, 이것저것 따질 것 없다,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이 없다, 앞뒤를 가리지 않는다, 막무가내로 달려든다, 더 이상 물러설 곳 없다’ 는 등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이판사판(理判事判)’ 이 이러한 의미를 갖게 된 것은 ‘이(理)’ 를 맡은 스님(理判)이면 어떻고 ‘사(事)’ 를 맡은 스님(事判)이면 어떠냐? , 또한 이상 세계면 어떻고 현실 세계면 어떠냐? , 굳이 꼭 甲이면 甲이고 乙이면 乙이라고 따질 것 있느냐? 하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理’ 는 理想, 理性, 이지(理智), 道理, 原理 등에서 인간의 정신적 ‘요소’ 를 뜻하고 있으나, 종교에서 말하는 ‘이(理)’ 는 ‘성(聖)의 세계’ 즉 天理를 의미한다. ‘理判’ 은 곧 ‘理’ 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理’ 의 세계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며,

 

‘事’ 는 인간세계의 그 어떤 구체적인 일을 뜻하며, ‘事判’ 은 ‘事’ 를 맡은 스님을 뜻하며 또한 구체적인 일(사물)에 대한 판단을 의미한다. 불교에서 ‘業' 과 ‘業報’ 를 굉장히 중시하는데, ‘事業’ 이란 ‘事’ 와 ‘業’ 의 합성어로서 역시 불교에서 유래된 어휘이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理判’ 은 주로 理想世界에 대한 판단, ‘事判’ 은 주로 現實世界에 대한 판단을 의미하는 데 사용되고 있다. 여기서 부연하여 설명하자면 중국에 朱子學(신유학)이 있는데, 우리 선조들은 조선조 500여 년을 통해 朱子學을 뼈가 절도록 받아들였다. 그러다보니 조선조 유생들이 맨 날 허구한 날 ‘理’ 냐? ‘氣’ 냐? 하는 논쟁을 벌였다. 儒敎에서 말하는 ‘理’ 가 佛敎에서의 ‘理’ 와 같은 것이고, 儒敎에서 말하는 ‘氣’ 는 佛敎에서의 ‘事’ 에 해당된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