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문. 편지글.

대설 날 방콕하다 보니 정종 향내음 그립다.

碧 珍(日德 靑竹) 2021. 12. 7. 20:04

대설 날 방콕하다 보니 정종 향내음 그립다.

 

새벽 일어나 TV를 켜니 큰 눈이 온다는 대설(大雪)이라 하였는데, 과연 오늘 눈이 내릴까 하며 은근히 기다리는 마음이었는데 눈은 내리지 않고 해가 저무니 추위를 느껴지기에 옷깃을 여미다보니 문득 지난날 즐겨 마시던 찐 쌀로 빚어 만든 맑은 정종(正宗) 향 내음이 아련히 다가온다. 대설(大雪) 뜻은 말 그대로‘큰 눈’으로 큰 눈이 온다는 의미에서 본격적인 겨울이 시작을 알리는 날로, 대설은 24절기의 하나로 소설(小雪)과 동지(冬至) 사이에 있는 날로 눈이 매우 많이 내리는 날을 대설이라 하였다.

 

대설(大雪)은 24절기의 21번째로 말 그대로 눈이 많이 내린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지만 이 시기에 꼭 눈이 많이 오지만은 않는다, 옛사람들은 대설 초 후에는 산박쥐가 울지 않고 중후에는 범이 교미하여 새끼를 낳고, 말 후에는 여주가 돋아난다고 하였는데, 대설에 눈이 오면 다음 해 농사에 풍년이 들고 따뜻한 겨울을 날 수 있다고 전하여지며, 눈이 많이 내리면 눈이 보리를 덮어 보온 역할을 하므로 추운 날씨에 보리가 동해(凍害)를 적게 입는다 하여‘눈은 보리의 이불’이라는 속담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어제는 외출하여 볼일을 보고 귀가하는데 쌀쌀한 날씨라 그런지 귀가길이 무엇인가 서운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어 대포집에 들러 한잔 하고 왔기에, 오늘은 윗녘 그 사람 말대로 나들이를 삼가고 방콕을 하자니 좀이 쑤시나 어쩔 수가 없다. 지난 50여년 즐겨 마셔왔던‘삼거리’‘대번’‘송학식당’‘무림식당’‘신주꾸(信宿)’등등 정종 대포집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지나가며 정종 향 내음에다 목을 넘어갈 때 그 따사함이 입맛을 다시게 한다.

 

아무튼 생각해보니 그는 애주가(愛酒家)이다, 그는 남들이 다하는 담배나 Go stop 등 화투나 포커 등 사행성 잡기와 춤과 주식투자 등 전혀 하지 못하지만, 술은 목을 넘어 갈 때 느낄 수 있는 그 독특한 맛 때문에 즐겨 마시고 두주불사(斗酒不辭)하지만 취한 일이 별로 없고, 술로 인하여 다툰 일이나 귀가 하지 않은 일은 없을 정도로 술을 좋아 하였다. 우리 속담에‘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듯이 애주가들은 너나 나나 모두가 자기가 좋아하는 술이 있는 집, 대폿집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게 술꾼들, 아니 애주가들의 참 모습이고 오늘의 그의 참 모습이 아닌가 한다.

 

지금 기억으로 52~3여 년 전 大邱 중앙로에 소재하였었던 몇 안대는 일식집‘삼거리’에서 대학을 갓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이 아들과 아버님이 삼거리식당 바(선 식탁)에 나란히 앉아 오뎅(어묵)에다 정종 대폿잔을 마셨던 것이 정종과 첫 인연인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 때부터 술을 마셔도 늘 아버님께서 곁에 계시는 것으로 무의식중에 인식이 되었기에, 나름대로 술을 마시고 크게 주사(酒邪)를 부려 본적이 없다고 생각하며 술을 마실 때면 늘 아버님께 고마움을 느끼며 한생을 살아왔었다.

 

근래 들어 즐겨 들리던 정종 대포집이 세월 탓으로 하나둘 문을 닫았다, 이 년여 전 문을 닫았지만‘신주꾸(信宿)’는 간이 외식 대포집으로 선후배간 많은 사연이 쌓였던 곳이다, 특히 그간 30여년을 즐겨 다니던 신주쿠(新宿)가 문을 닫으므로 대구 애주가들이 즐겨 먹어왔던 일품인 스모노와 겨자 식초 그 탁 쏘는 감칠맛도 정도, 이제 세월 속으로 사라지고 나니 지난날들이 아쉽고 허전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따사한 국물이 있는 오뎅에 정종 한잔을 주문하고 나면 마음이 포근하게 느껴진다, 한잔 들이키고 나면 모양새가 눈 오는 날 참새와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눈이 내리고 나면 마당에 참새들이 먹이를 찾아내려 앉아 모이를 찾듯이 추운 날씨에 그윽한 오뎅 국물에다 따끈한 정종이 지금도 그리워하는 마음은 참새가 방앗간을 못 잊듯이 그도 참새를 닮은 신세가 되어버렸는가 한다.

 

오늘따라 방콕 중인데 정종 생각이 간절하다, 이따금 마시는 정종이지만 오늘따라 곡물 내음에다 짜릿하게 목을 넘어가며 축이는 정종 맛에 그윽한 어묵(오뎅)과 그 국물 맛 가히 일미였다는 생각에 입맛이 다시다가,‘그는 혼자서 술을 잘 먹는다, 혼자서 한잔에다 한잔을 더하다보니 이것저것 생각이 나며 지난 온 칠십 팔년 삶에서 겪었던 희비애락이 주마등처럼 마음속을 지나가며 아버님 생각에다 생각을 더하여준다. 그립고 보고 싶은 아버님이시다, 오대독자로 태어나시어 첫 아들을 보게 되어 그렇게도 좋아 하셨다는 외할머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하게 다가오며, 아버님과 첫 정종을 마시던 50여 전 그날이 생각나 그렇게도 자식을 생각하여 주시던 은덕을 다시 한 번 감사하는 마음을 느끼다’가 무아지경(無我之境)에서 빠져 나오니 허전한 마음이다.

 

이러히 공허한 마음이 되는 날 해거름 녘 무렵이면 으레 정종(正宗) 대포에 꼬지를 곁들여 마시면 입 언저리에 달콤하고 감칠맛에 특이한 청향(淸香) 내음으로 맺은 대포잔 인연들이 그리워지며 지나살아온 삶이 panorama처럼 눈앞에 펼쳐진다. 우리 조상들은 쌀로 빚는 맑은술 청주(淸酒)인 정종(正宗)의 향기는 누룩향(麯子香)이 아니라 오묘한‘청향(淸香)’이라 하였다, 그러기에 조상들은 꽃향기와 과실 향기가 어울려 나는 오묘한 향기를 방향(芳香)이라 하여 왔었는데 이 방향 가운데 가장 깨끗하고 신선한 향기를 청향(淸香)이라고 하였다.

 

문득 그가 머물러 있는 이 세월이 어떻게 흘러 왔는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지나온 날들이 오래토록 곁에 있어 주리라 생각하였던 그 젊음이 어느덧 내 곁을 떠나갔다는 것을 희수(喜壽)를 지난 늘그막에 실감하는 게 또한 인생인가 한다. 인생길에서 얼마 남지 않은 삶을 생각하며 지나온 삶을 되새겨보면,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 사람과 술(酒)은 불가분 관계를 원초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이 술과 만나는 인연은 孟子가 하신 말씀처럼‘천천히 할 일은 천천히 하고 서두를 일은 서둘러야 한다(可以久則久 可以速則速. 가이구즉구 가이속즉속)’는 말이 있듯이 인연이라 자연스럽게 만나는 인연이 술이 아닌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