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사상

[스크랩] 同門修學(受學).

碧 珍(日德 靑竹) 2013. 2. 11. 11:41

同門修學(受學).

 

 

同門修學(受學),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말이다, 사전적으로는 한 스승 밑에서 함께 공부하였다는 말인데 그 뜻은 사람에 따라 사용 용도에 따라 다 다르다, 어느 누구나 이 말은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말이다, 우리가 人生을 살아가다 보면 徐居正과 金時習을 보듯이 同門修學을 하였다고 다 같은 반열(班列)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이따금 생각난다, 즉 同門修學을 하였다면 同窓이나 친구라고는 하겠으나 人生이라는 무대에서는 다 같을 반열에 있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한다.

 

우리 사람은 일상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조그마한 허물을 말하기는 어려워도 다른 사람의 허물은 침소봉대(針小棒大)하여 가면서도 말하기가 참으로 쉽기에, 돌아서서나 뒤에서나 술 안주꺼리로 삼아 남의 말을 하는 게 우리 사람 사는 사회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가 일상 無心하게 말하는 同窓(동창)이란, 同期(동기)란 말을 흔히 쓰고 있는데, 사전적인 의미로는 同窓이란 같은 학교나 스승에게서 함께 공부하거나 배움이나 또는 같은 학교를 졸업(卒業)한 사람을 말하고, 同期란 같은 年度에 入學이나 入社나 卒業 退社 따위를 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러기에 同門修學이니 同窓이니 하는 말을 음미하다가 동문수학한 두 천재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 적어며, 과연 同窓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다시 한 번 그려본다.

 

우리 역사를 보자면 朝鮮조 전기 士大夫 文人으로 동문수학한 두 천재로 徐居正과 金時習을 들 수가 있는데, 두 동문은 名利를 좇아 名分에 따라 후세에 그 평가가 다른데 역사는 金時習의 節義에 손을 들어주었다.

 

선조의 명을 받아 율곡 이이(栗谷 李珥)가 지은金時習傳을 보자면, 어느 날 徐居正의 화려한 행차가 조정으로 향하고 있었는데, 모두가 길을 비켜서는데 허름한 차림의 사내가강중(剛中)아, 잘 지내느냐며 길을 가로막고 섰는데, 무례함에 놀라 보니 바로 金時習이다. 수행하던 벼슬아치가 벌주려 하자 徐居正이그만 두어라. 미친 사람에게 따져 무엇 하겠느냐고 만류하였으며, 그리고만약 이 사람에게 죄를 준다면 뒷날 그대 이름에 누가 될 것이다고 말했다는 이런 일화가 실려 있다.(강중은 서거정의 字)

 

그렇다면 栗谷이 말하려던 것은 무엇일까?, 金時習의 행색은 徐居正의 화려한 행차와 대비되지만 金時習은 권세에 주눅 들지 않고 자유분방하였다는 것과, 徐居正이 수모를 당하고도 감히 벌주지 못하였던 것은 金時習이 그만큼 정신적으로 우월하였다는 의미가 아닐까 한다, 현실의 지위를 따진다면 견줄 수 없을 만큼 초라한 金時習이 어떻게 이런 우위에 있었을까? 하는 문제를 우리에게 일깨워 주려는 栗谷의 사려 깊은 뜻을 알아야 하겠다.

 

생각하면 역사에 가정(假定)이란 없지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기 위하여 벌인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없었다면, 목은 이색(牧隱 李穡)의 손자로 당대 최고관료였던 문인 병보 이계전(屛甫 李季甸)에게 同門受學(修學)한 徐居正과 金時習의 운명은 그처럼 엇갈리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의 앞날은 보장되어 있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는데도 계유정란으로 엇갈린 두 지식인의 행로가 전개되었던 것이다.

 

徐居正은 계유정난 찬양하고 현실과 타협하여 부귀영화 누리며 詩와 글을 쓰며 여유 있게 살았으나, 그의 글을 보자면 시벽(詩癖)과 주벽(酒癖)이 있다고 곳곳에서 고백하고 있으며, 현재 전하는 작품이 무려 6,000수가 넘는데 술을 노래한 것 또한 상당수에 달하고 있어 그의 여유 속에서도 인간적인 번뇌와 고통도 컸으리라 하겠으며, 삶의 행로에서 예감할 수 있듯 徐居正은 술과 시를 매우 좋아한 작가였다.

 

그러나 儒敎的 명분을 송두리째 뒤흔든 왕위 찬탈은 21세의 순수하였던 젊은 선비 金時習은 삼각산에서 과거 공부를 하다가 소식을 접한 金時習은 삼일 동안 문을 걸어 잠그고 통곡하다가 모든 책을 불살라 버리고, 승복으로 갈아입은 뒤 평생 이어진 방랑의 길을 떠나게 하는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남겼기에, 金時習은 왕위찬탈이란 소식에 평생 방랑하며 자기번뇌를 풍자 등을 그려내며 살았다.

 

생각하기에 서거정과 김시습도 마찬 가지다. 즉 한 작가의 삶은 어떤 방식으로든 작품 안팎에 흔적을 남기게 마련이기에, 그래서 부귀영화를 누리던 작가와 고통스런 삶을 견뎌야 하였던 작가의 작품은 한 눈에도 쉽게 구별할 수 있다고 하겠다.

 

조선전기 문인은 흔히 조정에서 문인 관료로 활동하던 관각파(館閣派)와 산림에 은거해 심성을 도야하던 사림파(士林派)로 나누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판적 지식인을 방외인(方外人)이라 부르는데, 서거정이 관각파 문인을 대표한다면 김시습은 방외인을 대표한다고 하겠다.

 

그런데 irony한 것은 이들에 대한 후세사람의 평가가 흥미를 끈다는 것이다, 즉‘조선왕조실록’의 사관은 徐居正이 죽던 날‘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지 못했고 후진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다. 이로써 세상에서 그를 작게 여겼다’고 혹평하였는데 이는 권력 독점에 대한 비판이었으나, 金時習은 생전에 한번도‘조선왕조실록’에 이름이 오르지 못하였지만 죽고 나서 상황이 달라지는데, 즉 그가 남긴 글을 수습하여 간행해야 한다는 논의로 시작된‘김시습 다시 보기’는 시간이 갈수록 확산되므로, 大義名分을 중시한 士林들이 김시습의 節義에 주목한 것으로 결국 정조는 金時習에게 이조판서를 추증하고 청간공(淸簡公)이란 시호를 내렸었다.

 

생각하기에 역사는 준엄하며 그것은 올곧게 산 자의 편이기에, 徐居正과 金時習은죽어서 잊혀 진 자, 죽어서 살아난 자’가 되므로, 이들 두 사람은 죽어서도 엇갈린 삶을 살았다는 것이다.

 

어느 누구나 한 사람으로서 살아온 지난날들은 참(眞實)과 거짓(忘却.妄覺)이라는 물레방아의 양축으로 알게 모르게 살아 왔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러기에 참과 거짓 사이에서 오락가락 하는 행위를 하면서 사는 게 우리네 人生이기에, 누가 누구가 참되게 살았느냐 위선으로 살았느냐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데도 지금 현실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은 초연하고 고고하고 참된 삶을 산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모르고 사는 우리네 인생이, 이웃이나 동창이나 남이 잘되는 것을 기뻐하여주기보다 도리어 시기나 질투나 심지어는 깎아 내리기를 즐겨하는 부류의 이웃도, 생각하기보다는 많은 게 우리 人生이란 舞臺라 하겠다.

 

                         

 

 

 

 

출처 : 벽진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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