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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士林, 그들은 과연“개혁세력(改革勢力)”이었나.

碧 珍(日德 靑竹) 2011. 4. 17. 14:21

    士林, 그들은 과연“개혁세력(改革勢力)”이었나.

     

                        김일손 선생을 배양한 함양 청계서원


    ‘士林’에 대해“15세기 중반 이후 성장한 중소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士族(사족)이며, 기득권 관료층인 勳舊(훈구)세력의 非理를 비판함으로써 그들의 독주를 견제했다”고, 현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서 정의하여 쓰고 있다.


    조선시대에도 오늘날처럼 야당 같은 정치세력이 존재했다, 바로“사림파(士林派)”라 불리는 정치세력이다.


    조선의 야당격인 사림파는 장장 70여 년 동안이나 극심한 탄압을 받으며 싸워 왔고, 이를 탄압한 집권 여당격인 세력이“훈구파(勳舊派)”라 불리는 정치 세력이다.


    훈구파(勳舊派)는 누구이고, 사림파(士林派)는 누구인가?


    훈구파와 사림파는 뿌리는 같으며, 모두 고려 말기에 나타난 신흥사대부 세력의 후예들이다.


    “신흥사대부”는“신흥”이라는 수식어가 말해 주듯이, 고려 말 대개가 친원(親元)세력인 권문세족들의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고자 했던  새로운 정치세력이었다.


    그야말로 신흥사대부는 권문세족의 등쌀에 허리가 휘는 일반 농민들에게 샛별 같은 희망을 주는 정치 세력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고려 말 부패한 권문세족을 반대하는 입장은 같으나, 다만 고려에 대한 생각은 같지 않아,


    고려를 타도하고 새로운 국가를 개창하자는 급진세력인 역성혁명파와, 고려자체는 존속시킨 체 개혁만 하자는 온건개혁세력인 온건개혁파로 나누어진다. 즉, 현대 사회과학 용어로 말하면, 신흥사대부가“혁명세력과 개량세력”으로 갈라 진 것이다.


    다시 말하면, 조선조의 훈구파는 바로 새 왕조에 참여한 역성혁명파의 후신이고, 사림파는 새 왕조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개혁파의 후신이다.


    사림파가 네 차래의 士禍를 당하고도 命脈을 유지 할 수 있었던 것은 사상과 조직을 가진 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즉, 영남지방의 사림들로 유맥(濡脈)의 큰 물줄기로 형성된 嶺南學派이며, 영남지방의 사림들인 이들은 학문적 系譜를 이어 가면서 훈구파의 탄압에 맞서 싸워왔다.


    이들은 性理學이라는 확고한 정치이념과 학통에 의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백여 년간 싸움 끝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사림파들은 훈구파와 싸울 때는 하나의 동지이었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동질성보다 내부의 이질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결과로 士林內部가 분열된 것이고,


    흔히들 말하는“四色黨爭”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정쟁이 시작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士林도 이런 과정을 거처 집권 후 東人과 西人으로 나뉘었으며, 이렇게 된 東西分黨과 政爭이 3백년 이상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조선을 망국으로 가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하지만“士林”은 반듯이 개혁적인 세력일까?,“수구적인 훈구파”와“진보적인 사림파”라는 二分法은 과연 옳은가?.


    조선 前期史 전공인 김범박사는“조선왕조실록”에서“ 훈구라 지칭된 인물들에 대해 분석 연구한 결과, 77.5%가 文臣 출신이었고 97.1%가 당상관 이상 오른 매우 뛰어난 인재였다.”고 말했으며, 그는 계간지“내일을 여는 역사”기고문에서“훈구세력에 대한 공정한 인식과 평가”를 통해 이와 같은 기존의 도식적인 통설에 문제를 제기했다.    


    훈구파는 대개가 重臣으로서 영향력을 충분히 인정받고 행사함으로써 긍정적인 순기능을 발휘하였다는 것이다.


    “勳舊”라는 말이“중요한 공을 세운 나이 많은 신하”라는 의미의“元勳舊臣”의 준말임을 생각하면 어떤 가치판단이 개입된 것 아니었다. 


    ‘士林’의 진보성. 긍정성을 강조한다고 해서,“勳舊”의 퇴행성. 부정성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또,‘勳舊’가“높은 관직을 차지한 대신”이고,‘士林’이“三司(사간원.사헌부.홍문관)등 언론 문필을 담당”한 인물이라 볼 때, 이들의 임무는  기본적으로 다른 것이라는 분석이다.


    따라서 현실적. 보수적 입장에 선 정책담당자는 이상적. 급진적 감찰 담당자로부터 공격을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것을“道德性”과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士林”은 훈구와 완전히 다른 사람들 이었나?,

     

                               무오사화와 와 함양 촉석루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결코 다르지 않다, 즉 기존의 연구들은 김종직을 士林의 宗匠으로 보고 있지만, 그가 훈구파의 대표적인 人物인 신숙주. 한명회 등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을, 지금까지의 연구에서는 경시하였다는 것이다.


    士林은“中小地主”로 보는 시각도 문제가 많은 것이다,


    왜냐하면 전형적인 사림으로 볼 수 있는 영남지역 주요 家門의 경제규모는“中小”수준을 넘는 다는 것이다.


    사림으로 알려진 중종 때 현량과 급제자 28명을 분석한 결과 가문의 위상과 사회적 배경이 기존의 지배세력과 거의가 비슷했었다.


    士林은 늘 改革政治에 앞장섰었나?,


    士林은 대동법 실시를 주장했다는 통설과는 달리, 정작 中央士林은 贊反으로 분열되었고 地方士林은 대부분 反對했었다.


    결국,“士林”과“勳舊”는“二分法的인 關係”라기보다“連續的 觀點”에서 봐야 한다는 것이 김범박사의 주장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며 옳은 판단인 것 같다.


    조선중기 이후 性理學이 支配理念이 되면서 그것을 신봉한 집단을 지칭하는“士林”이라는 표현이 점차 널리 쓰이게 되어, 기존세력을 지칭하던“勳舊”를 대신 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金돈 서울시립대교수는 勳舊. 士林의 사상적 차이에 주목하면서도“사회계층의 기반이 같았던 훈구와 사림은 시대적 역사적 역할에 관한 특성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았다.”고, 그의 저서“정치세력인 사림의 역사적 성격과 과제”에서 말하고 있으며, 김범박사가 지적한 견해에  타당성이 있음을 언급하였다.


    결론적으로, 士林은 勳舊를“업무상”공격하는 위치에 있었을 뿐, 도덕성과는 결부할 수 없으며, 개혁정책인 대동법을 두고도 士林內部도 分列하였고 반대자도 많았던 것과 같이, 二分法的인 관계라기보다 연속적인 관점에서“勳舊 와 士林”관계를  定立해야 한다는 것으로 사료 된다.  

                                                           碧 珍.


    출처 : 碧珍(벽진)
    글쓴이 : 碧珍(日德. 靑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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