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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은 과연 당쟁(黨爭) 때문에 亡했는가.

碧 珍(日德 靑竹) 2011. 4. 15. 11:58
      

조선은 과연 당쟁(黨爭) 때문에 亡했는가.

 

 

 

‘조선은 똑같은 나뿐 두 세력 사이의 싸움질인 사화(士禍)와 당쟁(黨爭)으로 망했다’고 주장하는, 日帝植民 史學의 찌꺼기를 어떻게 하면 말끔히 씻어 버릴 수 있겠는가는 이 시대 살아가는 우리가 정리해야 할 몫이다.

 

‘조선은 당파싸움 때문에 망했다’라고, 조선이 망한 이유를 물으면 가장 많이 하는 대답이 바로 당파싸움(黨爭)이다.

 

상고 하면 임진왜란 직전에 일본정세를 파악하기 위하여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사신들 중, 西人 黃윤길은‘처들어 올 것이다’라고 보고 한데, 東人 金성일은‘처들어 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상반된 보고를 올려 전란을 자초했던 파쟁(派爭)의 역사는, 조선망국의 이유로 당파싸움에서 찾으려는 견해에 신빙성을 더하여주고 있다.

 

이렇게 시작한 당파싸움이 임진왜란이후 300여년 이상 계속되다가,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기는 불행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이 일반적인 보통 인식9認識)이다.

 

일본인들은 식민지 지배라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고자 고도의 술책의 하나로, 한국인 스스로가 한국의 역사를 부정적 시각과 인식을 갖게 하도록 많은 정책을 고안하여 사회 곳곳에 실행하였는데 그중 하나가‘당쟁(黨爭)’이란 개념이다.

 

즉 일본인들이 조선이 당쟁 때문에 망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에게 주입하고 세뇌(洗腦)하여, 망국의 책임을 침략자인 일본이 아니라 한국인 스스로에게 돌리게 하려는 통치적 일환으로 조선역사(朝鮮歷史)를 악의적으로 이용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한국인 스스로가 우리의 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하게 함으로써 자괴감을 가지도록 하여,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한 것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하기위한 식민정책의 하나로‘당쟁론(黨爭論)’을 유포 확산시킨 것이다.

 

다시 말하면‘黨派싸움 亡國論’을 주도적으로 생산하고 확산시킨 장본인은 일본이며, 일본인들은 黨爭이란 용어를 의도적이고 계획적으로 더 나아가 악의적으로 사용했다.

 

이처럼 계획하고 조직적으로 韓國史를 비하(卑下)하는 작업을 창안한 것은 조선총독부이며, 이를 理論化 한 인물들은 총독부소속 학자들이고, 1924년 경성제국대학을 개학한 다음에 경성제대소속 교수들이 한국의 당쟁에 관한 이론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시작하였었다.

 

조선정치사를 압축 표현하는 한 개념으로‘黨爭’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학자는, 일본인‘시데하라 히로시(幣原 垣)’로 1990년 學政參與官으로 조선에 와서 조선의 교육개혁을 한다는 명분으로 교육 분야에 많은 영향력을 행사한 인물이며, 그는 1997년에‘朝鮮政爭志’에서 당쟁을 조선정치의 특성으로 규정하고 당쟁을 조선역사를 비하하는 도구로 이용하는 첫 발을 뗀 것이다.

 

또한 그는 조선시대의 정당들은‘主義를 가지고 서로 존재하는 公堂이 아니라, 이해관계에서 서로를 배제하는 私黨’이라 규정하므로, 한국인의 특성이라고 하는‘黨派性論을 일본인들은 정치적 목적에서 만들어 낸 것이다.

 

더욱이 일본인‘호소이(細井 啓)’라는 작자는 한국인의 피 속에는, 당파싸움을 좋아하는 선천적인 특이한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비 생물과학적-정치적으로 극단적인 발언을 서슴없이 할 정도이고, 그는 구체적으로‘조선인의 혈액에는 특이한 검푸른 피가 섞여있어서, 당파싸움이 계속 되었으며 이는 결코 치료될 수 없는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학자로서 자질문제가 의심되며 망언 중 망언이라 하겠다.

 

상고 해보면 黨派가 존재하지 않았던 일본보다 조선의 정치가 그만큼 선진적이었다는 말로 표현 할 수 있다, 즉 조선에는 일본보다 먼저 정당이 존재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당쟁이란 말을 조선말 학자 영재 이건창(李建昌)은‘黨議通略’에서‘당화(黨禍)’라고 표현하여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자기반성을 한 흔적을 알 수 있다.

 

‘黨派’란 말이 사용되기 전에 우리 스스로 이를 일컬은 말로‘붕당(朋黨)’이라 하였고, 政黨이란 말은 영어‘파티(Party)’의 해석으로 쓰기 시작한 것이고, 우리나라에서는 중국 송나라 구양수(歐陽修)의‘朋黨論’에서 사용한‘朋黨’이란 용어가 政黨을 가르치는 것으로 이해하고 사용하였다,

 

중국 남송 때 王安石의 부국강병책으로 두정파로 나누어 졌을 때, 농민중심의 개혁을 주장한 왕안석의 新法黨과 이를 반대하고 계속 지주중심의 정치체제를 주장한 사마광의 舊法黨 으로 나눈 진 것은, 약 950년 전인 11세기 중엽에 중국에서는 국가사회정책을 두고 당파가 나뉘는 선진적인 정치체제가 형성되었음을 시사 해주는 일이다.

 

왕안석의 신법이 실시되는 비슷한 시기에 저술된 것이 구양수의 朋黨論이며, 붕당론 에서는 君子黨(眞朋)과 小人黨(爲黨)이라 나뉘어 불렀다. (유럽은 17세기에 영국에서 정당으로 토리당과 휘그당이 처음으로 탄생했다.)

 

한나라의 정치체제는 그 나라의 사회구조의 산물이지, 그 나라를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의 혈액 속에 들어있는 특이한 요소의 반영이 아니며, 다시 말하면 근대 이전에 朋黨이 존재했다는 말은 그 나라의 정치체제가 근대 정치와 유사할 정도로 발전 하였었다는 것이다.

 

조선에만 당쟁이 있고 일본에는 당쟁이 없었던 이유는 일본인의 혈액 속에는 검푸른 피 가 없어서가 아니라, 일본 사회구조 그 자체가 主義와 理念을 가진 정당을 요구하지 않는 사회였기 때문이다.

 

일본은 主義와 理念이 아니고 모든 것이 칼이 지배하는, 즉 무사들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정당이 존재하지 못하고 만약에 있었다면 무사정권을 옹호하는 일당 독재만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조선의 당쟁을 미화할 수는 없는 일이다, 조선의 정당이 일본보다 일찍 발생했던 것은 사실이나, 그러나 정당의 존재가 사회발전에 크게 이바지 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

 

그러나 당쟁이 발생한 초기에는 東-西인들이 서로의 부패를 감시하는 기능적 역할 등 긍정적인 면도 있었으며, 그 외도 긍정적 기능은 있었다고 할 것이다. 따라서 조선의 당쟁은 단순히‘긍정적이다. 부정적이다’라고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 하며, 양면이 다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측면이 있기도 없기도 한 것이다.

 

또한 300여 년 진행된 당쟁의 시기 구분이 중요한데, 조선 당쟁의 시기구분의 잣대는‘共存의 틀’과‘독존(獨存)의 추구’라고 생각한다, 즉 당파끼리 공존을 추구하면 긍정적인 기능이 많고, 독존을 추구하면 부정적인 기능이 더 많아 졌다는 사실이다.

 

조선의 당쟁에서 공존의 틀이 무너진 것이 언제인가?, 무슨 이유 때문에 공존의 틀이 무너졌는가?,

 

바로 예송(禮頌)문제 때문이다, 즉 효종이 임종했을 때 아버지인 인종의 비인 자의대비의 복상(服喪)문제로 노론과 남인의 분쟁인, 즉 예송논쟁을 계기로 서인과 남인은 서로 공존할 수 없는 적이 된 것이다.

조선의 멸망한 원인을 서인의 오랜 일당독재에서 찾는다면 서인, 그 중에서 노론을 비판하고 송시열을 비난하나, 노론의 일당독재가 조선사회의 발전을 가로 막은 것은 사실이지만,

 

남인이라고 서인과 성격이 다른 집단이 아니라 노론과 남인 모두가 같은 사대부이며, 서두에 언급한바와 같이 남인이 오랜 기간 야당으로 있다 보니 현실의 불만에서 실학 같은 개혁적 학문을 만들고 서학(천주교)을 받아들인 것이지, 남인의 근본 성격이 노론과 달랐던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당쟁으로 공존의 틀이 붕괴한 것은 조선의 정치-사회자체의 커다란 영향을 주어, 政治가 政策이나 民生이 아니고 죽고 죽이는 살육전으로 전개되면서 조선의 사회발전을 가로 막는 주역으로 등장 한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강탈해 40여 년을 지배하는 동안, 우리 민족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것은 바로 망국적인 지역감정(당쟁)을 해소 시켰다는 것이다.

 

과거나 지금이나 지역감정은 지배층 사이의 권력투쟁의 산물이다, 기호지방이 세력기반이었던 노론과 영남지방이 세력기반이었던 남인 사이의 치열한 권력투쟁이 바로 지역감정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일제가 조선을 점령한 후 나라를 빼앗기므로 모든 권력은 남의 것이 되어 권력 때문에 생겼던 지역감정은 사라지게 되므로, 한반도에서 기호지방의 노론과 영남지방의 야당격인 남인을 구별하는 그 자체가 무의미하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 40년 식민치하로 인하여 지역감정이 사라졌다는 사실은, 일제 식민지배가 지독했다는 반증이며 기호와 영남으로 나뉘어 싸우던 우리민족은 日帝라는 하나의 적을 향하여 손을 잡았고,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가 당쟁으로 인한 지역감정을 사라지게하고 보다 큰 민족으로 통합시켰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 결과로 우리민족은 하나로 통합된 상태에서 지역감정이 없이 타에 의해 1945년에 해방을 맞이하게 되었다.

 

지역감정(地域感情)은 왜 생겨나는가? 하고 지역감정에 대해 생각해보자,

300년의 세월을 뛰어 넘어 지역감정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을 현재 제시한다면, 권력을 가진 자가 상대방을 적이 아니라 동반자(同伴者)로 인식해야 하는 것과, 상대방을 공존(共存)의 대상으로 인정하고 정당한 경쟁과 공정한 룰에 의해 정권을 주고받을 때, 공존이 이루어지며 지역감정의 산물인 政爭(黨爭.당파싸움)과 지역감정이 사라지게 될 것이라 사료된다.

 

                                           마하반야바라밀.日德 碧珍.


                                          
출처 : 碧珍(벽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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