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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선의 두 사상가와 사림(士林)이란(2).

碧 珍(日德 靑竹) 2011. 4. 17. 14:10

 조선의 두 사상가와 사림(士林)이란(2).

 

 

정암 조광조 묘 와 우암 송시열 묘

 

조선 건국초기는 이방원의 1. 2차 왕자의 난, 중종반정 등 여러 차례에 걸친 정변을 통하여 다수의 공신이 배출되고, 공신들에게 공신 호(號)를 주어 君으로 봉하고 막대한 규모의 토지도 주었을 뿐 아니라 경작할 노비도 주었고, 나아가 그들의 자손들은 과거도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아 갈 수 있는 음서(蔭敍)의 혜택까지 주었는데,

 

이렇게 형성된 공신집단과 고위직을 역임한 왕실의 외척인 척신(戚臣)세력 일부들이 합하여 하나의 세력이 형성된 것이“훈구파(勳舊派)”이다.

 

역성혁명파가 조선을 개창해 정권을 장악하여 정국을 주도하고 부패해 가는 동안, 조선건국을 반대했던 온건개혁파는 80~90년 동안 향촌에서 세력을 기르던 이들이, 9대 임금인 성종 때부터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여 집권 훈구파에 대한 끈질기고 꾸준한 저항을 했던 정치 세력이“사림파(士林派)”이다,

 

즉, 조선조의 훈구파는 바로 새 왕조에 참여한 역성혁명파의 후신이고, 사림파는 새 왕조에 참여하지 않은 온건개혁파의 후신이다.

 

조선 중기에 들면서 훈구파의 부패에 분개한 사림파가 임금과 백성들의 지지를 받으며 등장하게 된다.

 

우리는“사화(士禍)”라는 말은 누구나 기억한다, 연산군 4년(1498)에 일어난, 살아서 글로 권력의 잘못을 꾸짖은 것 때문에 죽어서 매질을 당하는 역사인 조선조의 대표적인 필화(筆禍)사건이요 훗날 당쟁의 불씨를 심어준 최초의 사화인, 무오사화는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문제 삼아 사림파 김일손 등을 처형한 사화이며,

 

뒤이어 갑자사화, 인종 때 을사사화,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로 인하여 조광조.김정.김구.김식 등 사림파가 훈구파에 의해 처형되는 역사적으로 불행한 일들이 발생했다.

 

사람파가 수차에 걸친 탄압을 극복하고 재기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성리학(性理學)이라는 확고한 정치이념(政治理念)과 공통의 스승을 모시는 학통(學統)으로 연결된 조직을 지닌 정치세력 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상과 조직을 가진 세력은 쉽사리 사라지지도 않고, 이념과 조직이 네 차래 사화를 당하고도 제기할 수 있게 해준 원동력이다.

 

고려 말, 정몽주. 길재. 김숙자 등 온건개혁파 학문을 계승한 사림파는 조선개국이후 세조대에 길재의 손제자(孫弟子) 점필제 김종직이 출사한 것을 필두로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조광조.김안국.조식.이이.이황.서경덕 등으로 이어지는 유맥(濡脈)의 큰 물줄기로 형성된 것이 영남학파(嶺南學派)이며, 영남지방의 士林들인 이들도 학문적 계보를 이어 가면서 훈구파의 탄압에 맞서 싸웠다,

 

이들은 性理學이라는 확고한 정치이념과 학통에 의한 조직이었기 때문에 백여 년간 싸움 끝에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사림파들은 훈구파와 싸울 때는 하나의 동지이었지만, 훈구파를 물리치고 집권당이 되자 갈라지기 시작했는데, 동질성보다 내부의 이질성을 강조하기 시작한 결과로 士林內部가 분열된 것이고,

 

흔히들 말하는“四色黨爭”이라고 부르는 조선의 정쟁이 시작하게 되는 결과를 낳고, 士林도 이런 과정을 거처 집권 후 東人과 西人으로 나뉘었으며, 이렇게 된 東西分黨과 政爭이 3백년 이상을 끌었을 뿐만 아니라 끝내는 조선을 망국으로 가는데 일조를 하게 된다.

 

사림파인 조광조는 영남지방에서, 조선에서 유일한 성현의 칭호가 있는 宋子는 영남지방에서는 사람 취급도 못 받으나 기호지방에서는 宋子라고 떠받들어졌다는 사실은, 곧 지역감정이 생겼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역감정이 생기면서 조선 후반기를 열어 나가는데, 우현한일은 일제침략이 우리민족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낳은 유일한 것은 무엇보다도, 바로 지역감정을 해소시켜다는 것이다.

 

조선이 일본에 합방되어 日帝下에서 혹독한 탄압으로 기호(畿湖)와 영남(嶺南)으로 나뉘어 싸우던 우리민족은 일제라는 하나의 적을 향해 손을 잡았고, 일제의 잔혹한 식민통치는 당쟁이 만든 작은 지역감정을 사라지게 하고 보다 크게 민족을 통합 시켜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통합된 상태에서 해방을 맞이했다.

 

그런데 해방 후 우리는 이렇게 사라진 지역감정이 왜?“지역감정망국론”이 나올 정도로 다시 격화 되었는가?

 

오늘날 지역감정은 공존의 틀을 부수고 독존을 추구하는 정치세력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현대사에서는 독존의 추구는 정권의 독점으로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제는 독존의 정치에서 벗어나야 하고 독존의 추구는 상대만 파멸시키는 게 아니고, 자신과 결과적으로 나라와 민족 전체를 파멸시키는 것이다.

 

한지역의 소외가 해당지역을 넘어서 나라와 민족전체를 파멸로 이끌었던 역사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우리 모두가 가슴깊이 길이 새겨두자, 恨이 憎惡로 발전하거나 부추겨서는 더욱 아니 된다는 것을, 역사는 말하고 있지 않는가.

 

士林이 무엇인지 溫響아 이해가 되느냐 새벽잠이 몰려오기 시작하니 눈이 잠기 워 지는구나.

 

                                             마하 반야바라밀, 日德 碧珍.

 

 

출처 : 碧珍(벽진)
글쓴이 : 碧珍(日德. 靑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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