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사상

건국 대통령과 근대화 대통령.

碧 珍(日德 靑竹) 2010. 3. 8. 10:42

건국 대통령과 근대화 대통령.

 

 

 

 

1945년 8월 15일 해방직후, 9월 오키나와 주둔군 존 하지 중장은 남한 군정 책임자로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 올 무렵은, 이미 평양에는 소련군이 진주해 있다는 상황은, 미국이 한반도에서 첫 우(愚)를 범하고 있을 때이다.

미국에 머물고 있던 老 독립투사 우남(雩南) 李承晩을 만난,‘로버트 올리버’교수는 그의 저서“신화에 가린 인물 李승만”에서,“내가 독립투쟁에 일생을 바친 것은 당신도 잘 알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자리에 연연해 나라를 소련에 넘길 궁리나 할 것 같습니까. 수백만 동포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그들을 속이면서 독립 국가를 세우기 위해 귀국한다고 말해야겠습니까. 강대국들은 제멋대로 자신들의 길을 가고 있고 내 말을 귀담아듣지 않습니다. 지금 망하고 있는 것은 한국뿐이 아닙니다.

 

미국은 어느 나라보다 더 큰 고통을 당할 것입니다. 소련의 정복 야욕을 저지할 나라는 미국뿐입니다. 지금의 사태를 직시하도록 경고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일이 더 무엇이겠습니까?”말했다고 그는 기술하고 있다.

 

이미 고희(古稀)를 맞은 외로운 독립운동가 李承晩의 의연한 풍모에 감동한 그는 평생을 우남의 동반자로. 정치고문으로 일생을 마친다.

 

당시 한반도 상황으로 볼 때, 지리적으로 소련의 영향권에 위치한 한국은 소련과 협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로버트 올리버교수는 민족.민주.사회.공산 주의자들을 망라한 연합정부 설립이 불가피하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승만 혼자 독자적 독립노선을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충고도 하였다.하지장군과 우남

 

雩南 李承晩은 여러 어려움을 겪은 끝에 환국하게 되었고, 이와 동시에 해방정국은 격동의 소용돌이에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하지와 李承晩의 불화와 아울러, 신탁 반대와 찬성, 미.소공동위원회의 공전 등 소련의 야욕에 대한 미국의 오판으로 혼란과 혼미의 거듭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그 결과 1947년 9월 23일 UN 총회는 남한만이라도 단독정부 수립을 위하여 UN 감시하의 자유선거를 결의하게 되었고,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만 국한되긴 했지만 한반도 역사상 최초로 민주선거가 실행되어, 제헌의원이 200여명이 선출되면서 국회에서 절대다수로 李承晩을 건국 대통령으로 선출한다.

 

李承晩 대통령의 재임 12년 후인, 1960년에 2.28 대구학생의거에 이어 4.19혁명으로 건국 대통령은 역사의 죄인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그 당시 독립운동가 金인서 목사가 집필한“망명 노인 李承晩 박사”라는 책을 발간해 유일하게 변호를 하여 주었었다.

 

건국 대통령 李承晩은 20대 후반에 미국으로 망명하여 해외에서 오르지 독립투쟁과 상해임시정부 초대대통령 등 다망한 활동으로 한평생을 독립운동에 진력(盡力)을 다하였고, 대한민국 건국, 6.25전쟁에서 구국적인 외교로 적군 격퇴, 반공포로 석방.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역사적으로 빛나는 큰 공로를 세웠다,

 

또한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 교육의 발달, 전재(戰災)복구 등을 우남(雩南) 李승만 대통령은 치적으로 남겼다.

 

雩南은 건국 초기의 숫한 어려움을 딛고 큰 치적을 남겼으나, 이에 반해 3.15 부정선거 자행과 시위 대열에 발포해 사상자를 낸 것, 국민방위군 부정사건, 탐관오리와 당파싸움 등 죄과에다, 헌법운영 잘못을 추가 죄로 열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부분적으론 올바른 지적도 틀린 지적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일반론적으로는 아직도 유효한 李承晩 대통령에 대한 평가이다.

 

“과거란 프롤로그다.(What is Past is Prologue)”라는 장막이 워싱턴 소재 미국 국립문서관(NARA) 현관에 걸려 있는데, 이 말은“과거 기록자체가 새로운 역사를 여는 서곡이고 시작이다.”뜻으로 우리에게 많은 생각을 하도록 그 시사 하는바가 크다.

 

어느 나라이건 퇴임 대통령이란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임은 틀림없다, 대통령 재임 시의 업적과 과오 그 모두는 미래 국정을 위한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이다,

 

1934년 루스벨트 대통령이 국립문서관을 세운 뒤, 12개의 지역문서관과 12개의 대통령 도서관을 산하에 두고 관리하고 있으며, 그리고 이와 별도로 운영되는 게 대통령 기념관이며, 대통령 사후에 그 업적을 평가하여 기념관으로 국가가 건립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토머스 제퍼슨, 에이브러험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등 세분 대통령만 기념관이 있다.

 

2008년이면 우리나라도 정부 수립 60주년을 맞는데, 그간 메스콤 보도를 보면 퇴임 대통령의 기록관이 속속 생겨날 것 같다, 金대중 전 대통령 도서관에 이어, 盧무현 전 대통령과 金영삼 전 대통령도 고향 인근에 도서관 건립을 타진하거나 추진 중이라 한다.

 

우리 냉철히 생각해보자, 그간 우리는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오늘의 한국을 있게 한 건국 대통령을 잊고 살아 왔으며, 또 오늘날 우리는 현재 생존한 전 대통령들이 자신들의 기념관을 세우기 앞서,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가 있다.

 

그것은 역사와 순리에 관한 것으로, 역대 대통령 9명 중에서, 왜 8번째, 9번째 대통령 기념관이 먼저 등장해야 하는가가 문제이다.

 

특히 역사적 평가가 완결된 건국 대통령 李承晩과, 근대화 대통령 朴正熙를 위한 기념관은 왜 세워지지 않는가. 우리의 어느 퇴임 대통령이라도 그 시대의 특성과 여건에 따라 공과(功過)가 있기 마련인데, 李 대통령은 공산주의의 위협 속에서 나라를 세우고 지켰고, 朴 대통령은 나라를 빈곤에서 선진국으로 발돋움을 하여 세계로 향하게 하지 않았는가. 모 심는 박 대통령

 

과연 두 전 대통령의 기념관을 건립할 수 없다면, 어느 퇴임 대통령의 기념관이나 도서관을 세울 수 있다고 하겠는가, 국민 된 도리로 가슴에 손을 대고 정치인이나 국민 모두가 냉철하게 생각하여, 우리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아야 하겠다.

 

우리는 생존하고 있는 前-現 대통령의 기념관 짓기에 앞서, 건국 대통령과 근대화대통령의 기념관을 짓자는 제안을 정치인과 정부는 무엇 때문에, 왜 대통령에게 건의하지 못 하는가,

 

나라를 위한다는 정치인들과 위정자들은 부끄럽지도 않은가, 하물며 국민인 우리자신도 부끄러운 국민으로 스스로 전락되고 있는 게 오늘날 현실 속 우리 국민의 상이며, 더욱이 정치인들은 가면을 쓰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 아닌가 한다.

 

실례로 金대중은 재임 중인 1999년 5월 朴정희 기념관 건립 지원을 약속했으나, 이후 시민단체의 반대를 이유로 슬그머니 꼬리를 내리며 물러서고 나니, 그 후 모금은 중단됐고 국고 보조 문제는 지금 법정에 가 있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으며, 훗날 후손들에게 어떻게 변명이라도 할 수 있겠는가 안타까운 마음이다.

 

盧무현은 대통령은 취임 직후인 2003년 4월에 건국 대통령 李승만에 대한 언급은 한마디도 없이, 참여정부는 김구 선생의 뜻을 이어받는다고 하니, 이런 분위기에서 민간인 누구 가 나설 수 있었겠는가,

 

사람 사는 사회에서, 인생사. 세상사에는 도리와 질서란 게 있다, 위정자들이나 대통령이 역사의 무게를 안다면, 건국과 근대화 대통령의 기념관을 앞세우고, 생존 전 대통령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 좋든 싫든 평가를 거친 후 자신의 기념관을 짓기를 바라는 것이 바른길이며, 그리고 자신들의 기념관 건립은 겸손하게 먼 후일로 넘겨 놓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러한 전철이 있는 상황이므로, 어느 국민이든 어느 정파의 정치인-예비 대선후보를 꿈꾸는 사람은, 李승만 건국 대통령과 朴정희 근대화 대통령의 기념관 건립을 선거공약으로 내어 걸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碧 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