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星山 呂씨의 근원.

碧 珍(日德 靑竹) 2009. 7. 3. 12:08

    星山 呂씨의 근원.

     

     

     

    ○東國氏始祖 翰林學士 新羅典書 府君家狀(동국여씨시조 한림학사 신라전서 부군가장)

     

    東國氏(동국여씨)란 말은, 中國氏(중국여씨)에 대한 상대말로 사용된 것인데, 다른 말로 바꾸면, 한국여씨로 된다. 동국여씨 始祖(시조)라는 말은, 한국땅에 살고 있는, 모든 氏始祖(여씨시조)가, 서로 같다는 뜻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다.

     

    翰林(한림)이란, 中原(중원)땅 唐(당)나라 벼슬 이름이고, 典書(전서)란 신라시대 벼슬이다. 신라시대의 벼슬이름인 전서가, 고려시대에 와서는 尙書(상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고려말에 版圖判書(판도판서)라는 벼슬 이름이 보이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모두 判書(판서)란 이름으로 통일 되었던 것이다.

     

    동국여씨에 星山派(성산파)가 있고, 咸陽派(함양파)가 있다.

     

    이들 始祖(시조)의 諱(휘)가 禦梅(어매)이시다. 삼가 살피건데 府君(부군)이 당나라 翰林院 大學士(한림원대학사)로 일하시던 가운데, 僖宗(희종) 乾符(건부) 4년에 黃巢亂(황소란)을 피하여, 처자를 거느리시고 신라땅 동북으로 건너왔다.

     

    이때가 신라 憲康王(헌강왕) 3년이었다. 星山派(성산파) 世譜(세보)에는, 始祖(시조)禦梅公(어매공)이 신라말기에, 典書(전서)가 되었다고 적혀있다.

     

    始祖(시조)인, 典書府君(전서부군)의 아들과 손자들 이름을 모두 모르게되어, 민망하게 살아오던 가운데, 高麗大將軍(고려대장군) 林淸(임청)으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이른바 咸陽 氏(함양여씨)가 되었고, 高麗三重大匡(고려삼중대광) 良裕(양유)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어져서 이른바 星山 氏(성산여씨)가 된 것이다.

     

    將軍公(장군공)이 前書公(전서공)의 몇 代孫(대손)인지 알 수 없고, 大匡公(대광공)이 전서공의 몇 대손인지 알 수 없게 되어, 애석하게도 星山派(성산파)와 咸陽派(((함양파)가 함께 世譜(세보)를 하지 못하는, 불행이 있게 된 것이다.

     

    世譜(세보)는 함께 하지 못하나 始祖(시조)가 같기에, 서로를 宗氏(종씨)라고 하면서 왕래한다. 성산은 경상북도 가야산 및 성주고을의 옛 이름이요, 함양은 경상남도 서쪽 지리산 밑 고을 이름이니, 이들 사이 거리는 200리가 못된다.

     

    이들이 모두 영남땅이고 보면, 東國氏(동국여씨)의 뿌리가 영남에 있음이 틀림없고, 그것은 신라시대에 뿌리가 내려졌기에, 그렇게 된 것이다.

     

    ○星山派 中始祖 高麗三重大匡 府君家狀(성산파 중시조 고려삼중대광 부군가장)

     

    新羅典書(신라전서) 禦梅(어매) 後裔(후예)에 良裕(양유)가 있다. 양유가 곧 부군의 諱(휘)이다. 府君(부군)은 高麗忠烈王朝(고려충열왕조)에 성주고을에서 태어나셔서, 擧人進士(거인진사) 성주고을 冶洞里(야동리)에 사셨다.

     

    禑王(우왕)6년, 이성계 장군이 전라도 雲峰(운봉)에서 왜장 아지발도를 무찌를 때, 府君(부군)이 군량공급 하는 일을 자진하여 맡았다. 雲峰大捷(운봉대첩)에 대한 논공행상에서, 부군에게 알려진 勳號(훈호)가, 三重大匡(삼중대광)이었다.

     

    여기에 대한 것이, 大東韻府群玉(대동운부군옥)이라는 책에 실려있다. 群玉(군옥)이라는 책은, 조선국 선조 때 학자였던 草澗(초간) 權文海(권문해)가 엮은 것으로 모두가 20권이다.

     

    초간은 退溪門人(퇴계문인)이다. 부군의 배(配)가, 貞敬夫人(정경부인) 碧珍李氏(벽진이씨)인데, 同正(동정) 李昌幹(이창간)의 딸이요, 隴西郡公(농서군공) 李長庚(이장경)의 외손녀이다.

     

    부군이 아들 둘을 두었는데, 장남이 渭忠(위충)이요, 차남이 渭賢(위현)이다. 위충은 中郞將(중랑장)이 되었고, 위현은 版圖判書(판도판서)가 되셨다. 위충이 4남1녀를 두었는데 希德(희덕),希哲(희철),希福(희복),希正(희정)이 그 차례이다.

     

    희덕은 典書(전서)이고, 희철은 府尹(부윤)이고, 희복은 少監(소감)이고, 희정은 副正(부정)이었다. 1녀가 韓天富(한천부)의 아내가 되었는데, 韓(한)이 중랑장이었다.

     

    渭賢(위현)이 2남을 두었는데, 克禋,(극인) 克誨(극회)가 그 차례이다. 극인이 漢城尹(한성윤)이고, 극회가 工曹判書(공조판서)였다.

     

    府君(부군)으로부터 아래로 내려오면서, 世譜(세보)가 이룩되기에, 府君(부군)이 이른바 星山氏(성산여씨)의 中始祖(중시조)가 되는 것이다.

     

    府君(부군)의 墓(묘)를 잃어버렸고, 貞敬夫人(정경부인)의 墓(묘)도 잃어버렸다. 그리하여 해마다 寒食날에, 敬梓堂(경재당)에서, 處祀(처사)로 行祀(행사)한다. 敬梓堂(경재당)은 府君(부군)의 齋舍(재사)이며, 성주읍 북녘 冶洞里(야동리)에 있다.

     

     

     

    星山 呂씨의 파명,

     

     

     

    派(파)에 대한 이름은 後裔(후예)들의 世居地(세거지)가 되는 땅이름으로 정한다. 星山氏(성산여씨)의 제일차 분파가 이른바 大邱嘉昌派(대구가창파)와 星州派(성주파)로 나뉘어진다. 中郞將公派(중랑장공파)라고 하지 말고, 嘉昌派(가창파)로, 版圖判書公派(판도판서공파)라고 하지 말고, 星州派(성주파)라고 하는것이 옳다.

     

    嘉昌派(가창파)는 中郞將公(중랑장공) 후예들의 세거지가 가창이기에 嘉昌派(가창파)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嘉昌面(가창면) 杏亭里(행정리)에 주로 世居(세거) 하였기에 세거분류상 杏亭派(행정파)가 된다. 中郞將公(중랑장공)의 孫子(손자)인 純(순)이 삼형제를 두셨는데 長子(장자)는 處士公(처사공) 文淸(문청)으로 1.杏亭伯派(행정백파)요, 次子(차자)는 進士公 (진사공) 文明(문명)으로 2.杏亭仲派(행정중파)며, 三子(삼자) 는 寺正公(시정공) 文承(문승)으로 3.杏亭季派(행정계파)로 분파된다.

     

    星州派(성주파)에서 계속 分派(분파)가 있게 되는데, 그 제 일차 분파가 星州本派(성주본파)와 星州伽川派(성주가천파)로 나뉘어진다. 성주본파의 派祖(파조)는 고성현령 子方(자방)이고, 성주가천파의 派祖(파조)는 의성현령 子庸(자용)이다. 子方(자방)은 공조판서 克誨(극회)의 맏아들이고, 子庸(자용)은 克誨(극회)의 둘째아들이다. 固城公派(고성공파)라고 하지말고, 星州本派(성주본파)로 義城公派(의성공파)라고 하지 말고, 星州伽川派(성주가천파) 라고 하는 것이 옳다.

     

    星州本派(성주본파)에서 分派(분파)가 생겼는데, 맏집이 성주 本派(본파)가 되고, 둘째집이 성주 鳩亭派(구정파)가 되고, 셋째집이 關北派(관북파)가 된다. 성주본파의 派祖(파조)는 詠(영)이고, 성주구정파의 派祖(파조)는 諫(간)이고, 관북파의 派祖(파조)는 雄(웅)이다. 詠(영)은 宣略將軍(선략장군) 仁甫(인보)의 맏아들이고, 諫(간)은 그 둘째아들이고, 雄(웅)은 그 셋째아들이다.

     

    星州本派(성주본파)에서 또 分派(분파)가 생겼는데, 맏집이 星州泠川派(성주영천파)가 되고, 둘째집이 星州樹村派(성주수촌파)가 된다. 泠川派(영천파)의 派祖(파조)는 진사 冶傭(야용) 希端(희단)이고, 樹村派(수촌파)의 派祖(파조)가 持坪(지평) 圓亭(원정)希臨(희림)이다. 圓亭(원정)은 冶傭(야용)의 아우이다. 進士公派(진사공파)라고 하지 말고, 성주 泠川派(영천파)로(대동보상 진사공파), 圓亭公派(원정공파)라고 하지말고, 星州樹村派(성주수촌파)라고 하는 것이 옳다.

     

    星州進士公派(성주진사공파)는 進士公(진사공) 希端(희단)의 孫(손) 處士公(처사공) 胄男(주남)후예가 4.星州進士公 伯派(성주진사공백파)이고, 處士公(처사공) 胤男(윤남)후예가 5.星州進士公 仲派(성주진사공중파)이며, 處士公(처사공) 季男(계남)후예가 6.星州進士公 季派(성주진사공계파)로 분파된다.

     

    수촌파가 번성하여 分派(분파)가 생겼는데, 樹村伯派(수촌백파), 樹村仲派(수촌중파),樹村叔派(수촌숙파),樹村季派(수촌계파)가 그 분파이름이 된다. 圓亭先生(원정선생)이 樹村里(수촌리)에 터를 잡고 옮겨 살았기에, 원정후예는 모두가 수촌파가 된다. 원정선생이 一男(일남)을 두었다. 그 외아들이 沉(침)인데, 司直(사직)이다. 司直公(사직공)이 四男(사남)을 두었는데,

     

    그 四兄弟(사형제) 후예가, 이른바 樹村四派(수촌사파)이다.

     

    圓亭公孫(원정공손) 處士公派(처사공파) 라고 하지말고, 7.星州樹村伯派(성주수촌백파)로 원정공손 參議公派(참의공파) 라고 하지말고,8.星州樹村仲派(성주수촌중파)로 , 원정공손 生員公派(생원공파)라고 하지말고, 9.星州樹村叔派(성주수촌숙파) 로 원정공손 左尹公派(좌윤공파)라고 하지말고, 10.星州樹村季派(성주수촌계파)라고 하는 것이 옳다.

     

    子方(자방)의 子(자) 宣略公(선략공) 仁甫(인보)의 次子(차자) 司直公(사직공) 諫(간)의 후예가 11.鳩亭派(구정파) 이며, 三子(삼자)인 雄(웅)의 후예가 12. 關北派(관북파)다.

     

    星州伽川派祖(성주가천파조)인 子庸(자용)이 二男(이남)을 두었는데, 맏집이 伽川本派(가천본파)가 되고, 둘째집이 星州船南派(성주선남파)가 된다.

     

    가천본파에서 둘째집이 金山(김산) 기럴 耆洞(기동)으로 옮겨서 金山耆洞派(김산기동파)가 생기게 된다.

     

    子傭(자용)의 曾孫(증손) 遇文(우문)의 후예가 13.金山派(김산파)다.

     

    鑑湖先生(감호선생)이 기럴출신이다. 鑑湖(감호)의 후예가 번성하여, 休庵公派(휴암공파), 通德郞公派(통덕랑공파), 道巖公派金(도암공파),로 분파된 것이다.

     

    休庵公派(휴암공파)라고 하지말고 14.金山伯派(김산백파)로, 通德郞公派통덕랑공파) 라고 하지말고 15.金山仲派(김산중파)로, 道巖公派(도암공파)라고 하지말고 16.金山季派(김산계파)라고, 하는것이 옳다.

     

    子庸 (자용)의 曾孫(증손) 希文(희문)의 후예가 17.鷄項派(계항파)이고, 子庸(자용)의 曾孫(증손) 希甫(희보)의 후예가 18.淸道派(청도파)다.

     

    星州船南派(성주선남파)에서 그 선남이 어디인고 하면 오도마루가 되는 吾道宗村(오도종촌)이다. 현감(諱 漢弼)공파라고 하지말고 船南吾道派(선남오도파)라고 하는 것이 옳다. 船南吾道派(선남오도파)는 子庸(자용)의 次子(차자) 熹(희)의 子(자) 漢弼(한필)의 후예가 19.釜洞派(부동파며), 漢弼(한필)의 玄孫(현손) 益男(익남)의 後裔(후예)가 20.慶山派(경산파)로 분파된다.

     

     

    大同譜(대동보) 星山氏世系圖(성산여씨세계도)상 派名.

     

     

    *大邱杏亭伯派(대구행정백파)-- 處士公(처사공) 文淸派(문청파)

    *大邱杏亭仲派(대구행정중파)-- 進士公(진사공) 文明派(문명파)

    *大邱杏亭季派(대구행정계파)-- 寺正公(시정공) 文承派(문승파)

    *星州進士公伯派(성주진사공백파)--進士公(진사공 希端(희단)孫(손) 處士公 (처사공) 冑男派(주남파)

    *星州進士公仲派(성주진사공중파)--進士公(진사공) 希端(희단)孫(손) 處士 公(처사공) 胤男派(윤남파)

    *星州進士公季派(성주진사공계파)--進士公(진사공) 希端(희단)孫(손) 處士 公(처사공) 季男派(계남파)

    *星州樹村伯派(성주수촌백파)--圓亭公(원정공) 希臨(희림)孫(손) 處士公 (처사공) 允恭派(윤공파)

    *星州樹村仲派(성주수촌중파)--圓亭公(원정공) 希臨(희림)孫(손) 參議公 (참의공) 允忠派(윤충파)

    *星州樹村叔派(성주수촌숙파)--圓亭公(원정공) 希臨(희림)孫(손) 生員公 (생원공) 允恕派(윤서파)

    *星州樹村季派(성주수촌계파)--圓亭公(원정공) 希臨(희림)孫(손) 左尹公 (좌윤공) 允儉派(윤검파)

    *鳩亭派(구정파)--宣略公(선략공) 仁甫(인보)二子(이자) 司直公(사직공) 諫(간) 派(파)

    *關北派(관북파)--宣略公(선략공) 仁甫三子(인보삼자) 雄(웅) 派(파)

    *金山派(김산파)--義城公(의성공) 子庸(자용)曾孫(증손) 參奉公(참봉공) 遇文派(우문파)

    *金山伯派(김산백파)--鑑湖公(감호공) 大老(대로)子(자) 休庵公(휴암공) 姬佐派(희좌파)

    *金山仲派(김산중파)--鑑湖公(감호공) 大老(대로) 二子(이자) 通德郞公(통 덕랑공) 姬佑派(희우파)

    *金山季派(김산계파)--鑑湖公(감호공) 大老(대로) 三子(삼자) 道巖公(도암 공) 姬弼派(희필파)

    *鷄項派(계항파)--義城公(의성공) 子庸(자용) 曾孫(증손) 進士公(진사공) 希文派(희문파)

    *淸道派(청도파)--義城公(의성공) 子庸(자용) 曾孫(증손) 學生公(학생공) 希甫派(희보파)

    *釜洞派(부동파)--義城公(의성공) 子庸(자용) 孫(손) 縣監公(현감공) 漢弼 派(한필파)

    *慶山派(경산파)--縣監公(현감공) 漢弼(한필) 玄孫(현손) 戶曹參判公(호조 참판공) 益男派(익남파)

     

     

     

     

    星山 呂씨 세거록.

     

     

    1.得貫 淵源(득관 연원)

     

     

    中國(중국) 唐(당)나라에서 翰林學士(한림학사)를 지낸 禦梅(어매)가, 僖宗(희종) 乾符(건부)4년 (서기877년 신라 헌강왕3년)에, 黃巢(황소)의 亂(란)을 당하여, 萊州(래주)로부터 신라에 건너와, 典書(전서)를 지냈다.

     

    이 분이 星山(성산)에서 大姓(대성)을 이루게 한 氏(여씨)의 始祖(시조)이며 그 後裔(후예)가 星山氏(성산여씨)와 咸陽氏(함양여씨)로 分貫(분관) 되었다.

     

    典書公(전서공) 이래로, 高麗朝(고려조)에서 代代(대대)로 벼슬을 지냈을 것이나 年代(연대)가 玄遠(현원)하여, 諱字(휘자)와 官職(관직)이며, 몇 대를 내려왔는지 알 수 없다가, 고려말엽 성산 고을에서 擧人進士(거인진사)로 發身(발신)하여, 高麗(고려) 三重大匡(삼중대광)을 지낸 良裕(양유)를, 성산여씨의 中始祖(중시조)로 하고, 高麗 大將軍(고려대장군)을 지낸 林淸(임청)을 함양여씨의 中始祖(중시조)로 하며, 성산여씨는 성주,김천,대구,등지에, 함양여씨는 서울, 청주, 영동, 등지에 世居(세거)하고 있다.

     

    성산은 星州(성주)의 옛 지명으로, 三國遺事(삼국유사)를 살펴보면, 星山伽倻(성산가야)는 六伽倻(육가야) 중 하나이며, 本彼縣(본피현), 星山郡,(성산군), 京山府(경산부), 星山縣,(성산현), 星州牧,(성주목)등으로 불리다가, 지금은 星州郡(성주군)으로 불리고 있다.

     

     

    2.氏族(씨족) 分派來歷(분파내역)과 世居地(세거지)

     

     

    星山氏(성산여씨) 中始祖(중시조)인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長子(장자)는 고려 中郞將(중랑장)을 지낸 渭忠(위충)이고, 次子(차자)는 고려 版圖判書(판도판서)를 지낸 渭賢(위현)이다.

     

    中郞將公(중랑장공) 후예는 대구 가창파로, 가창면 행정, 영천일대에 世居(세거)하고 있으며, 판서공 후예는 성주파로, 判書公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장자)는 克禋(극인)으로, 漢城尹(한성윤) 掌令(장령), 경상도 安廉(안염)을 지냈고, 차자는 克誨(극회)로 工曹判書(공조판서)를 지냈다.

     

    工曹判書公(공조판서공)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長子(장자)는 固城縣令(고성현령)을 지낸 子方(자방)이고, 次子(차자)는 義城縣令(의성현령)을 지낸 子庸(자용)이다. 고성현령공의 후예는 星州派(성주파)로 성주군내에 주로 살고 있으며, 의성현령의 후예는 金山派(김산파)로, 김천시 구성면과, 성주수륜면, 대구시, 청도, 등지에 分居(분거)하고 있다.

     

    ○ 大邱(대구) 嘉昌派(가창파) 世居地(세거지)

     

    성산여씨 중시조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 의 장자 渭忠(위충)의 字(자)는 國賓(국빈)이요, 관직은 고려조때 中郞將(중랑장)으로 文武(문무)를 겸한 名將(명장)이시다.

     

    이분이 嘉昌派祖(가창파조)시다. 고려말 이성계와 함께 지방의 紅巾賊(홍건적)을 물리치고, 수시로 침범하는 倭寇(왜구)와의 交戰(교전)에서 큰 戰果(전과)를 세웠고, 그들을 討伐(토벌)하기 위해 충주,용인,문경,등지를 전전하던 중 그 후예가 칠곡, 군위,등지에 거주하다가, 중랑장공의 九世孫(구세손) 希佶(희길)이, 명종원년(1546)에 軍威(군위)에서 대구가창에 入鄕(입향)하여, 행정,영천,정대리 에 세거하고 있다. 중랑장공의 손자인 純(순)이 삼형제를 두셨는데 長子(장자)는 文淸(문청)으로 伯派(백파)요, 次子(차자)는 擧人進士(거인진사) 文明(문명)인데 중파요, 三子(삼자)가 司僕寺正 (사복사정) 文承(문승)인데 季派(계파)이다.

     

    ○ 星州派(성주파) 世居地(세거지)

     

    星州派祖(성주파조) 固城縣令公(고성현령공)에게 손자가 셋인데, 長孫(장손)은 護軍(호군)을 지낸 詠(영)으로 星州派(성주파) 이고, 次孫(차손)은 司直(사직)을 지낸 諫(간)이니 鳩亭派(구정파)로, 성주 등지에 分居(분거) 하고있고, 季孫(계손)은, 雄(웅)으로 關北派(관북파) 이며, 함경도 길주, 등지에 분거하고 있다.

     

    성주파의 護軍(호군)이신 詠(영)의 字(자)는 監役(감역)인 遇昌(우창)이며, 公의(공) 長子(장자)는 進士(진사)인 希端(희단)이며, 성주 進士公派(진사공파)이다.

     

    次子(차자)는 持平(지평)인 希臨(희림)으로, 號(호)가 圓亭(원정)이며, 이 분이 星州 樹村派祖(성주수촌파조)이시다. 원정선생의 子(자)는, 司直(사직)인 沉(침)으로, 司直公(사직공)이 四男(사남)을 두셨는데, 長子(장자)는 允恭(윤공)으로 樹村伯派(수촌백파)이고, 次子(차자)는 允忠(윤충)으로 樹村仲派(수촌중파)이며, 三子(삼자)는 允恕(윤서)로 樹村叔派(수촌숙파)이고, 四자(사자)는 允儉(윤검)으로 樹村季派(수촌계파)이다, 원정선생의 後裔(후예) 四派(사파)가, 星州郡(성주군) 碧珍面(벽진면) 樹村里(수촌리)에, 世居(세거)하고 있다.

     

    ○ 金山派 世居地(김산파 세거지)

     

    金山派祖(김산파조)는 義城縣令(의성현령)인 子庸(자용)이다.

     

    아들 緝(집)은, 金海府使(김해부사)를 지냈고, 孫子는 忠武大護軍(충무대호군)을 지냈던 允成(윤성)으로, 이분이 金山耆洞派祖(김산기동파조)이다.

     

    允成(윤성)의 둘째 아들, 希望(희망)의 아들 從濩(종호)가, 성주에서 金山耆洞(김산기동)에 入鄕(입향)했다. 종호의 아들이 應龜(응구)이고, 孫子(손자)가 大老(대로)인데, 자는 聖遇(성우)요, 호는 鑑湖(감호)이다.

     

    鑑湖公(감호공)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첫째가 姬佐(희좌)로 金山伯派(김산백파)이고, 둘째가 임진왜란때 부친 감호공과 함께 倡義(창의)하여 殉死(순사)한 姬佑(희우)로 金山仲派(김산중파)이며, 셋째가 進士(진사)와 文科(문과)에 登第(등제) 했으나 官職(관직)을 멀리하여 夫人壽職(부인수직)으로 戶曹參議(호조참의)가 된 姬弼(희필)로, 金山季派(김산계파)이다.

     

    또 김해부사를 지낸 緝(집)의 넷째 아들 通仕郞(통사랑) 九成(구성)의 후예가 鷄項派(계항파)로, 長子(장자) 希文(희문)의 후예는 성주군 수륜면에, 次子(차자) 希甫(희보)의 후예는 청도에 聚落(취락)을 이루고 살고 있으며, 義城公 子庸(의성공 자용)의 둘째아들인 通仕郞(통사랑)을 지낸 熹(희)의 후예가, 대구,부동,경산시내에, 集成村(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서원 및 제당.

     

       1.敬梓堂(경재당)
     

    이 堂(당)은 성산여씨의 中始祖(중시조)이며, 擧人進士(거인진사)로 發身(발신)하여, 高麗 三重大匡(고려삼중대광)을 지낸 良裕(양유)의 位牌(위패)를 모시고, 매년 寒食(한식)날에 享祀(향사)를 치르고 있는 곳이다. 또한 이곳은 大匡公(대광공)이 살았던 곳이라 후손들이 遺墟碑(유허비)를 세우고, 公(공)을 追慕(추모)하는 곳이다. 대광공은 禦梅(어매)의 後裔(후예)로 태어났으며 高麗(고려) 禑王(우왕)6년(1380) 大將軍(대장군) 李成桂(이성계)가 倭將(왜장) 아지발도와 싸우려 나갈 때 그 집으로 찾아와서, 戰略(전략)을 相議(상의) 했으며, 雲峰 (운봉)싸움에서는 軍糧(군량)을 補給(보급)하여 大捷(대첩)을 거두게 하였다. 그 뒤 李太祖(이태조)가 누차 불렀으나, 오직 학문에만 뜻을 두고 나아가지 아니하므로, 數結(수결)의 復戶(복호)를 내렸다. 大匡公(대광공)이 食水(식수)로 삼던 우물속에, 井(정)이라는 刻石(각석)이 있었는데 倭政(왜정)때 메워졌다. 병자호란 뒤 湖南士林(호남사림)이 그를 追慕(추모)하여 李太祖(이태조)의 비 옆에 祠堂(사당)을 세우려 하였으나, 財力(재력)이 여의치않아 중지 했다고 기록되어있다. 雲峰大捷(운봉대첩)이 있게 한 功(공)으로, 高麗 三重大匡(고려삼중대광)이라는 勳爵(훈작)을 받게 된 것이다. #梓-始祖(시조) 재
     
    ㅇ.敬梓堂 柱聯(경재당 주련)- 八行詩며 주련은 후손이 짓는다. #聯-짝 맞출 련.
     
    *東國 氏 始祖誰(동국여씨 시조수)
    *新羅前書 學士(신라전서 여학사)
    *子孫繁多 而失傳(자손번다 이실전)
    *至於高麗 王敎曰(지어고려 왕교왈)
    *進士星山 良裕(진사성산 여양유)
    *討倭有功 錄勳曰(토왜유공 록훈왈)
    *三重大匡 壁上臣(삼중대광 벽상신)
    *所載冊名 韻群玉(소재책명 운군옥)  

     

    2.雲陽書院(운양서원)
     

    이 書院(서원)은 圓亭先生(원정선생)의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한 書院(서원)으로써, 선생의 諱(휘)는 希臨(희림), 字(자)는 大之(대지)요, 號(호)는 圓亭(원정)이며, 本貫(본관)은 星山(성산)이다. 중종11년(서기1516년)에 領議政(영의정) 鄭光弼(정광필)의 推薦(추천)으로, 王子(왕자) 福城君(복성군)의 師傅(사부)가 되었다가, 그 뒤 昌寧縣監(창영현감)과 牛峯縣令(우봉현령)을 지내다 士禍(사화)가 자주 일어나서 뜻있는 선비들이 많은 禍(화)를 입게되고, 정치가 어지러워지자, 세상이 혼란함을 슬퍼하며 鄕里(향리)에 내려와, 月會堂(월회당)을 建築(건축)하여, 그곳에서 氏鄕約(여씨향약) 講論(강론)등, 後進養成(후진양성)에 힘 쓰시다가 嘉靖(가정) 癸丑(계축)년(1553)에 칠십삼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그를 따르던 선비들이 모두 슬퍼하였다. 그 뒤 川谷書院(천곡서원) 鄕賢祠(향현사)에 位牌(위패)를 모시고 推仰(추앙) 되었으나, 高宗(고종)5년 戊辰(무진)(1868)에 書院(서원) 撤毁令(철훼령)으로 서원이 毁撤(훼철)되었다가,1874년 士林(사림)의 힘으로 雲陽書院(운양서원)이 세워져,다시 明德祠(명덕사)에 位牌(위패)를 모시고 春秋享祀(춘추향사)가 이루어지고 있다. 享祀日(향사일) 은 음력이월 마지막 丁日(정일)과, 음력팔월 마지막 丁日(정일)인,해뜰무렵 寅時(인시)에 行祀(행사)함.
     
    ㅇ.川谷書院(천곡서원)의 첫이름은, 징기 延鳳山(연봉산) 밑에 자리잡았기에 延鳳書院(연봉서 원)이었다. 징기 앞을 흐르는내(川) 이름이 伊川(이천)이요, 징기 동산이름이 雲谷山(운곡산)이라, 伊川雲谷(이천운곡) 네글자에서, 川谷(천곡) 두글자를 따서 寒岡(한강)이 退溪(퇴계)에게 품하여, 川谷書院(천곡서원)으로 바꾸게 된것이라함.
    #寒岡(한강)-文穆公 鄭逑(문목공 정구)-本貫(본관淸州),字(道可), 號(寒岡),시호(文穆).


     
    3.圓亭先生 遺蹟碑(원정선생유적비)
     

    諱(휘) 希臨(희림), 字(자) 大之(대지), 號(호) 圓亭(원정). 선생께서는 중원땅 송나라 도학군자 大臨(여대림)처럼 되기를 바라면서, 大臨(여대림)이 힘쓴 藍田鄕約(남전향약)을 베풀기 위해 講會所(강회소)를 일어켰는데, 그 집이름이 月會堂(월회당)이다. 鄕約施行(향약시행)강회소 로는, 선생이 일으킨 월회당이 우리나라 에서는 처음이다. 선생이 福城君(복성군) 禍(화)에 連坐(연좌) 되다보니, 선생의 文籍(문적)을 모두 잃게되었다. 선생은 중종임금의 제일 왕자인 福城君(복성군)의 師傅(사부)로서, 김안로의 모함인 이런바 『東宮殿(동궁전) 灼鼠變怪(작서변괴)』사건에 連累(연루)되어, 귀양살이를 機張(기장)과 咸平(함평)에서 하게된다. 김안로가 賜死 (사사)된후, 풀려나 司憲府(사헌부) 持平(지평)에 除授(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아니하고, 징기 樹村里 (수촌리)로 돌아와, 鄕約(향약) 과 禮學(예학)을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셨다. 성균관 시절 趙靜菴(조정암)과 道義交(도의교)를 맺고, 성균관 시절 福城君(복성군) 師傅(사부)가 된 것인데, 그 薦目(천목)인즉, 先生(선생)께서 經學(경학)과 禮學(예학)에 造詣(조예)가 깊다는 것이었고, 薦者(천자)인즉 領議政(영의정)인 文翼公(문익공) 鄭光弼(정광필) 이었다.   #薦目(천목)-사람을 천거 하는데 필요한 명목.  #薦子(천자)-천거한 사람.
     

     
      4.月會堂(월회당)(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48호)
     

     
    月會堂(월회당)은 樹村里(수촌리)에 所在(소재)하며, 當初(당초)에는 鳳山里(봉산리)에 中宗(중종)11년 丙子(병자1516)년에 創建(창건)하였으나, 火災(화재)로 燒失(소실)된 것을 景宗(경종)4년 甲辰(갑진1725)년에 後孫(후손)이 현위치에 重建(중건)하였다. 創始者(창시자) 圓亭先生(원정선생)은 鄕土(향토) 子弟(자제)들에게, 淳風和睦(순풍화목)의 風化敎育(풍화교육)을 목적으로 書院的(서원적)인 성격으로 창건하여, 이 곳에서 氏鄕約(여씨향약) 교육을 시행하였으며, 그 뒤 朝廷(조정)에서는 氏鄕約(여씨향약)을 刊行(간행)하게 되었고, 김안국이 경상도 관찰사 로 재임시에 여씨향약교육을 試圖(시도)한 바 있다. 月會堂(월회당)의 명칭은 月一講會(월일강회)의 縮語(축어)로, 매월1회 한자리에 모여 講(강)을 한다는 뜻이며, 이 명칭대로 삼백여년간 꾸준히 실천해 오고있다. 이 堂(당)에서는 1919년 파리 萬國平和會議(만국평화회의)에 巴里長書(파리장서)를 써서 署名(서명)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던 本居地(본거지) 이기도 하며, 私學堂(사학당)으로써 鄕約講會(향약강회), 禮儀凡節(예의범절), 敬老思想(경노사상) 교육등, 매월 일회 講會(강회)를 실시함과 동시에 養老所(양로소)를 설치하여, 오십세 이상 참석자에게 酒肉(주육)으로 供養(공양)하는 美風(미풍)이 있는 것이 特色(특색)이다. 이 건물은 顯宗(현종) 오년(1664)에 復元(복원)한 特異(특이)한 건축양식으로, 本堂(본당)은 木造瓦家(목조와가) 접뱃집 十四間(십사간) 남향집이고, 前面(전면) 동쪽에 藏書閣(장서각)은 西向三門(서향삼문)이며, 典祀廳(전사청)은 東向三間(동향삼간)이며, 大門(대문)은 접지붕으로 三間 大型門(삼간대형문)으로, 御侮門(어모문) 額(액)이 있다. 건물전체를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하여 경상북도가 지방문화재로 지정, 보존 관리하고 있다.
     
    ㅇ.月會堂大門名(월회당대문명)
    月會堂(월회당) 大門(대문) 이름이 禦侮門(어모문)이다. 막을어(禦)자에 업신여길모(侮)자다. 남들로부터 받게되는 업신여김을 막아낸다는 뜻이다. 이 大門(대문)을 자주 들락거려서 藍田鄕約(남전향약)즉 여씨향약 을 익히고, 지식을쌓고, 행실을 바로하면, 남 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으니, 자주 드나들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 주기위해, 대문 이름이 禦侮(어모)로 되었든 것이다.
    本堂(본당) 에서는 바둑,장기,등 雜技(잡기)를 禁(금)하고,윷놀이만 정월 밤에만 할 수 있다.
     
     
     
    ㅇ.月會堂柱聯(월회당주련)-八行詩(팔행시)

    *奉先祖 遵晦庵家禮(봉선조 준회암가례)- 선조를 받들고 朱子(주자) 家禮(가례)되로 시행하며, 그것을 지킨다.
    *立宗規 用藍田鄕約(입종규 용람전향약) - 종당규약을 세워서,남전향약을 사용하도록 한다.
    *叙昭穆 講老泉譜設(서소목 강로천보설)- 昭穆(소목)에 대한 차례매김은, 蘇老泉(소로천)이 지은 족보설을 참고로한다.   #昭穆(소목)- 사당에 신주를 모시는 차례
    *敎子孫 倣玉山義學(교자손 방옥산의학)- 자손들을 가르침에있어, 남전동쪽 옥산사람들이, 집안사람들을 자기집에서 밥먹여가면서, 가르쳤든 것을 본받도록한다.
    *有田宅 依吳州置庄(유전택 의오주치장)- 논밭과 집이 있도록하되, 范仲淹(범중엄)과 그아들 堯夫(요부)가, 착한일을 했던 보리(麥 ), 배(舟), 몽땅주기 같은 일을하자.
    #범중엄 아들 요부가 아버지 명을 받고, 보리곡수를 받으려고 갔다. 돌아오는길에 단양에서 오주사람 벗인 석만경을 만났다. 만경의 딱함을 들은 요부는, 보리곡수 오백섬을 실은 배(舟)까지 만경에게 주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요부가 아버지를 뵈오니, 아버지가 이르기를 동오에서 옛벗을 만났드냐고 물었다. 아들이 이르기를, 만경을 만났는데 어버이를 잃고 葬事(장사)를 치루지 못하여 단양에서 머물고 있었습니다. 고 했다. 그 아버지가 이르기를 보리, 배, 모두 만경에게 주고 올것이지, 그렇게 하지못했드냐 고 했다. 아들이 이르기를 보리, 배, 모두, 만경에게 주고 왔습니다 고 했다.

    *接賓客 誦周詩伐木(접빈객 송주시벌목)- 손님과 나그네를 맞이하거든, 너희들이 먼저 고운 소리를 내어야 한다. 귀한 사람들이 자꾸 모여들도록 만들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雖原無 事壹月一會(수원무 사일월일회)- 비록 아무런 일이 없다고 하더라도, 한달에 한차례는 모여서.
    *念玆有 初以燕以翼(염자유 초이연이익)- 이 할아버지가 애초에 너희들을 편안하게 살아가도록 도우려고 일어켰든, 이 월회당이 지니고 있는 뜻을 머릿속에 간직하기 바란다.
     
     

    ㅇ.月會堂附屬養老所(월회당부속양로소)
    나이 오십이 되면 養老所(양로소)에 들어가서, 십년동안 첫 늙은이(初老) 待接(대접)을 받는다. 還甲(환갑)을 지내면, 중늙은이(中老)가 되어 두터운 待接(대접)을 받게된다. 이 중늙은이들이, 月會堂(월회당) 西쪽방에 들어가게된다. 칠십세가되면 상늙은이(上老)가 되어 東쪽방에 들어가게 된다. 이 상늙은이 들이, 가장 두터운 待接(대접)을 받게된다. 방안에 들어가서도 나이대로 앉게되는데 東쪽방의 경우 가장나이가 많은 이들이 東쪽을 등지고 西쪽을보고 앉고, 그 中央(중앙)에 가장나이가 많은이가 앉게된다. 그 다음이 北쪽을 등지고 南쪽을보고 앉게되고, 그다음이 南쪽을 등지고 北쪽을 보고 앉게되고, 그다음이 西쪽을 등지고 東쪽을 보고 앉는다. 西쪽방은 가장나이가 많은이들이 西쪽을 등지고 東쪽을 보고앉는데, 그中央(중앙)에 가장나이 많은이가 앉게된다. 그다음은 北쪽을 등지고 南쪽, 그다음은 南쪽을 등지고 北쪽, 그다음은 東쪽을 등지고 西쪽으로 앉는다. 어느쪽이든 中央(중앙)에 年長者(연장자)가 앉게된다. 겨울철에는 구둘목 中心(중심)으로 앉다보니, 變形(변형)이 생긴다. 밥상에 오르는 반찬도 上, 中, 첫,늙은이 순으로 한가지씩 줄어든다. 이는 반찬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나이덕(年德)을 기리기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養老所(양로소)에서 會食(회식)이 있게되면 子孫(자손)들이 나와서 자기집 어른들이 받게되는 밥상을 지켜보게하여, 그로하여금 어떤느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함이다.
     
    ㅇ.月會堂檢擧(월회당검거)
    檢擧(검거)가 되는 이는 本堂(본당)에서 施行(시행)되는 모든일을 總括(총괄)하고 命令(명령)을 내리게 되는데, 거의 終身職(종신직)이 된다. 檢擧(검거)는 본당에 속하는일에 絶對權(절대권)을 가지게되고, 다른사람은 檢擧(검거)가 결정한 일에 복종한다. 檢擧資格(검거자격)은 칠십세이상 德(덕)이 있는 사람으로, 宗老會(종로회)에서 뽑는다.
    뽑혀진 檢擧(검거)는, 원정선생 冑孫(주손)에게 薦擧(천거)된다. 冑孫(주손)이 承認(승인)하면 檢擧(검거)가 되고, 그렇지 못하면 宗老會(종로회)에서 다시검거를 뽑아야한다.
    5.龜岡齋(구강재) (경상북도 지방문화재 제 280호)
     


    龜岡齋(구강재)는, 圓亭先生(원정선생)이 府君(부군) 監役公(감역공) 愚昌(우창)의 묘소 밑에 廬幕(여막)을 짓고, 中宗(중종) 삼십삼년(1538) 戊戌(무술) 삼월부터 삼년간 侍墓(시묘)살이를 하던 곳으로, 선생의 아들 司直公(사직공) 沉(여침)이 廬幕(여막)을 헐고 그 자리에 현재의 구강재를 건립하여 보존해 왔다. 선생 年譜(연보)에 의하면, 『嘉靖(가정) 十七年(십칠년 戊戌(무술) 先生五十八世(선생오십팔세) 所居之廬(소거지려), 募僧守之(모승수지) 因爲墓齋(인위묘재) 山中人稱之以虎坪寺(산중인칭지이호평사)』 라는 紀錄(기록)에서, 선생의 侍墓(시묘)살이를 하던 우막집을, 一名(일명) 虎坪寺(호평사)라 불리워졌음을 알 수 있다.
    규모는 자연석 基壇(기단)위에 正面 三間(정면삼간) 側面 二間(측면이간) 홑처마 팔작지붕이며, 좌측에 三間 廚舍(삼간주사)와 一廊(일랑)을 이루고 있다. 이 齋舍(재사)는 조선 明宗(명종) 13년(1558)에 건축된 稀貴(희귀)한 건축양식과 역사가 있는 건물로 경상북도 문화재로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 있다.  #廚(주); 부엌주
     

      6.漫然堂(만연당)
     

     
    孝曾(효증) 字(자)는 魯而(노이)요 號(호)는西巖(서암)이다. 公(공)은 從遊於文康公(종유어문강공)旅軒先生之門(여헌선생지문)하야, 학문과 文章(문장)을 당시 諸賢士(제현사)가 敬服(경복)하였고, 仁廟朝(인묘조)에 三曹正佐郞(삼조정좌랑)과 出佩六府(출패육부)하다. 所莅之民(소이지민)이 方德於金石(방덕어금석)이라 頌(송)하고, 榗紳之間(진신지간)에 望實俱重(망실구중)하다. 晩而(만이) 築一堂曰漫然(축일당왈만연)이라, 公(공)이 林川郡守(임천군수)시 異木名曰(이목명왈) 則栢(칙백)이라 庭畔(정반)에  移栽(이재)한봐 大可數圍(대가수위)요, 高可百尺(고가백척)이라 四時長翠(사시장취)하니 以是(이시)로 增顔色(증안색)이라, 公(공)이 晩年(만연)에 同志諸賢(동지제현)과 더불어 吟詠成趣(음영성취)한 堂(당)이다.
    7.天然記念物 則栢(천연기념물 칙백)나무
     

     

    8.可隱書堂(가은서당)
     

     
    圓亭(원정)선생의 후손 孝思(효사)는 字(자)가 述而(술이) 號(호)가 月潭(월담)이니, 左承旨(좌승지) 燦(찬)의 아들이며, 通訓大夫(통훈대부) 行禮曹正郞(행례조정랑) 겸 春秋館記注官(춘추관기주관)인 孝曾(효증)의 아우로, 甲午(갑오)에 中進士(중진사) 하였으나 이후 有遯世之志(유둔세지지)하고, 深深山谷(심심산곡)인 이곳을 찾아 학문을 硏磨(연마)한 곳이다.    書堂正面(서당정면)에는 奇巖絶壁(기암절벽)이 둘러쳐있고, 大伽川(대가천) 原流(원류)가 서당을 감싸흐르는 경치가 뛰어난 곳으로, 講讀(강독)하는 餘暇(여가)에, 산천경치를 逍遙(소요)하며 所詠(소영)한 詩(시) 數白首(수백수)를 이곳에서 남겼다.

    9.鏡陽書堂(경양서당)
     

     
    이 堂(당)은 應龜(응구) 字(자)는 文瑞(문서) 號(호)는 松塢(송오)며 公(공)의 子(자)인
    大老(대로) 字(자)는 聖遇(성우) 號(호)는 鑑湖(감호)이니 위 父子(부자)분을 위하여 후손이 세운 堂(당)이다.
     
    10.松塢先生杖屢臺(송오선생장루대) 鑑湖先生 倡義碑(감호선생 창의비) 鑑湖先生遺墟碑(감호선생유허비)
     

     
     
    11.道陽書堂(도양서당)
     

     
    이 堂(당)은 姬弼(희필) 字(자)는 嘉會(가회) 號(호)는 道巖(도암)이며, 金山(김산) 季派(계파) 派祖(파조)이신 公(공)을 追慕(추모)하여 후손이 세운 書堂(서당)이다.
     
     
    12.廣巖亭(광암정)
     

     
    公(공)의 諱(휘)는 錫輔(석보)요, 字(자)는 佑吉(우길)이요, 號(호)는 廣巖(광암)이다. 純祖(순조)24년 甲申(갑신)에 태어나셨다. 金山派祖(김산파조)인 義城縣令公(의성현령공)의 16世孫(세손)으로 金山季派(김산계파)이다. 自少(자소)로 聰明才智(총명재지)하여 老日湖上(노일호상) 兩門(양문)에서 授業(수업)하고, 江湖(강호)의 君子(군자)와 得聞爲學(득문위학)하고 門戶(문호) 樹立(수립)하여, 禮(예)로서 奉先(봉선)하고, 鏡陽堂(경양당)을 일으켜 鄕土士林(향토사림)들의 寓恭之所(우공지소)하고, 後進(후진)에 학문을 獎勵(장려)하며 引導(인도)하였고, 賓客(빈객)과 朋友(붕우)를 맞이하여 上映之(상영지)하며, 항상 善(선)을 생각하고 朋友(붕우)끼리 相互(상호) 激勵(격려)하고 도우며 修德(수덕)하였으니, 道德君子(도덕군자)라 稱(칭)하더라. 後裔(후예)가 공을 追慕(추모)하여, 공이 즐겨찼던 경치가 좋은곳에 亭子(정자)를 創建(창건)하였는데, 建築樣式(건축양식)이 特異(특이)하여 文化財的(문회재적) 가치가 높다고 評(평)한다.
     
    13.瞻慕齋(첨모재)
     

     
    瞻慕齋(첨모재)는 中郞將(중랑장) 渭忠(위충)을 추모하여 후손들이 창건하였다. 字(자)는 國賓(국빈)이며, 고려조 중랑장으로 文武(문무)를 겸한 名將(명장)이시다. 高麗末(고려말) 李成桂(이성계)와 더불어 북방의 紅巾賊 (홍건적)을 征伐(정벌) 하고, 수시로 침범하는 倭寇(왜구)와의 交戰(교전)에서 큰 戰果(전과)를 올렸으며, 말년에는 落鄕(낙향)하여 後進養成(후진양성)에 힘쓰셨고, 몸소 孝悌(효제)를 示範(시범)하여 후세에 龜鑑(귀감)이 되었다. 오랜 風霜(풍상)에 齋舍(재사)가 頹落(퇴락)하여, 1984년 에 重建(중건)하였다. 公(공)의 墓所(묘소)는 失傳(실전)하고, 餞春日(전춘일)에 이곳에서 후손들이 祭奠(제전)을 올린다.
    享祀日(향사일)-陰曆(음력) 3월29일
     
    14.觀水亭(관수정)
     

     
    선생의 諱(휘)는 渭來(위래) 字(자)는 元佰(원백) 號(호)는 觀水亭(관수정)이며, 선생의 형의 諱(휘)는 渭龍(위룡) 字(자)는 天見 (천견) 號(호)는 洗心亭(세심정)이다. 두 형제분이 학덕을 兼備(겸비)한 선비로서 鄕里(향리)에 遯世之志학(둔세지지)하고, 後學養成(후학양성)에 힘쓰셨다. 이 관수정은 川邊(천변)에 위치하니 상 하류에 바위가 둘러져있고 層層絶壁(층층절벽)에 쌓여있으며, 청용산에서 根源(근원)한 細川(세천)의 물과 늘 마주할수 있어, 관수정이라 이름하고 인하여 自號 (자호)하였다. 공의 伯氏(백씨)또한 늘 물과 마주하여 맑은물에 마음을 씻는 정신으로 洗心亭(세심정) 이라 自號(자호)하니, 이로써 선비의 맑고 깨끗한 정신을 엿볼 수 있다. 오랜세월에 건물이 頹落(퇴락)한 것을 1996에 重建(중건)하였다.
     
    15.三七齋(삼칠재)
     

     
    希臨(희림) 圓亭(원정)선생의 子(자)沉(침) 工曹參議公(공조참의공)이 四兄弟(사형제)를 두셨는데, 이분이 樹村四派祖(수촌사파조)이시다 삼칠재는 수촌백파 齋室(재실)이며, 伯派祖(백파조)의 諱(휘)는 允恭(윤공) 이시다.
    16.八兄堂(팔형당)
     

    17.追慕齋(추모재)
     

     
    이 추모재는 수촌 叔派齋室(숙파재실)이며, 叔派祖(숙파조)의 諱(휘)는 尹恕(윤서) 이시다.

    18.遠慕齋(원모재)
     

     
    이 원모재는 수촌 季派齋室(계파재실)이며, 季派祖(계파조)의 諱(휘)는 尹儉(윤검) 이시다.


    19.追慕齋(추모재)
     

     
    公(공) 의 諱(휘)는 希文(희문) 字(자)는 善載(선재) 號(호)는 旅伽(여가)인데, 義城公(의성공)子庸(자용)의 次孫(차손) 九成公(구성공)의 아들로, 연산군4년 戊午(무오1498)에 태어나시고, 명종 14년 己未(기미1559)에 돌아가셨다(卒). 공은 氣稟(기품)이 嚴正(엄정)하고 自幼(자유)로 好學文(호학문)하여, 文章(문장)에 博識(박식)하였고, 進士及第(진사급제)하시다. 寒暄堂(한훤당) 김선생과 有同門之誼(유동문지의) 結爲道義之交(결위도의지교) 하였다. 공의 世居地(세거지)는 성주군 선남면 도원리 인데, 公(공)이 書堂(서당)을 세운뒤에 마을이 생겼다하여 이웃마을에 무릉리가 있으니, 中國(중국)의 武陵桃源(무릉도원)에 격을맞추어, 마을 이름을 도원리라 하였다 한다. 末年(말년)에 공께서 鷄項(계항)에 移居(이거)하시어 鷄項派祖(계항파조)가 되셨고, 그 후예가 공을 追慕(추모)하기위하여 齋舍(재사)를 창건하였다.
    20.松湖書堂(송호서당)
     

     
    大翊(대익) 字(자)는 子高(자고)요 號(호)는 永慕齋(영모재)라, 숙종7년 辛丑(신축1681)에 慶山(경산) 松湖(송호)에서 태어나셔서 十歲(십세)에 學小學孝經(학소학효경)하였고, 효성이 至極(지극)하였다. 甲午(갑오)에 往拜塤箎鄭先生(왕배훈호정선생)하야, 講學于普賢山(강학우보현산)하고, 退與諸益(퇴여제익)으로, 講論于綾泉山(강론우릉천산)하니, 原根(원근) 受業者(수업자) 不能容(불능용)이라, 영조 18년 壬戌(임술1742) 享年(향년) 62세로 卒(졸)하니, 鄕內諸賢(향내제현)이 슬퍼하였다. 돌아가신지 칠십여년후인 순조 16년 丙子(병자1816)에, 鄕土士林(향토사림)이 公(공)을 추모하여 서당과 祠宇(사우)를 건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써 諸儒(제유)를 輩出(배출)하였고, 祠宇(사우)에 位牌(위패)를 奉安(봉안)하고 享祀(향사)하고 있다.


    21.親睦堂(친목당)
     

     
    본당은 義城公(의성공)의 玄孫(현손) 晩生(만생)의 孫(손) 사형제중 셋째 弘男公(홍남공)이 성주에서 대구로 移居(이거)하여, 釜洞(부동)에 始居 (시거)한 공 의 후예가 藍田鄕約(남전향약)의 德目(덕목)을 실천하기 위하여, 고종25년(1888)에 창건, 于今(우금) 백여년이 되고 본당을 중심으로 門戶(문호)를 열어 학문을 崇尙(숭상)하고, 修人事 接賓之道(수인사 접빈지도)를 다하였으니, 조선말엽까지만 해도 遠近(원근) 儒林諸賢(유림제현)이 연일 운집하여, 학문을 論(논)하고 후진을 양성하고, 宗族(종족)의 親睦(친목)을 圖謀(도모)하는데 크게 寄與(기여)한 곳이며, 지금도 본당에서 隨時(수시)로 宗會(종회)를 열어 宗事(종사)를 論議(논의)하는 곳으로 活用(활용)되고 있다.

     

    22.虎溪亭(호계정)
     

     
    焯(작) 字(자)는 晦仲(회중)이요 號(호)는 虎溪(호계)인데, 선조20년에 登文科(등문과)하고, 禮(예), 刑(형), 工(공) 正郞(정랑)과, 龍岡(용강) 하동군수 忠淸都事(충청도사)를 역임하고, 歸鄕(귀향) 餘生(여생)을 보낸곳에 후손이 公(공)을 追慕(추모)하여 세운곳이다.
     
     
     
    23.元堂墓域(원당묘역)
     

     
    公공)의 諱(휘)는 倫(윤)이요 字(자)는 仲敦(중돈)이며, 星州派祖(성주파조) 固城公(고성공)의 玄孫(현손) 進士(진사) 諱(휘) 希端(희단)의 曾孫(증손)으로, 文康公(문강공) 旅軒(여헌)張先生(장선생)의 姊兄(자형)이시다. 公(공) 은 先代(선대)의 敎訓(교훈)을 받들어 학문과 修德(수덕)에 힘써, 德望(덕망)과 行實(행실)이 있어, 여헌 장선생이 이 세상 어느 名儒(명유)와도 比(비)할 수 없는 善人(선인)으로, 評(평)하였다. 時運(시운) 不幸(불행)으로, 임진왜란을 만나 성주 甑山(증산) 골짜기에 隱遁生活(은둔생활)을 하셨다. 선조 27년 癸巳年(계사년 1593)에 卒(졸)하셨고 近年(근년)에 후예가 묘역을 改修(개수)했다.

     
    24.河回宅 古宅(하회택 고택)-경상북도지정문화재 제388호
     

     
    이 古宅(고택)은 鑑湖公(감호공)의 次子(차자)인 金山仲派(김산중파)의 命周(명주)가 1680년대에 건립한 건물로서, 건립당시 六十餘間(육십여간) 규모의 大邸宅(대저택) 이었으나, 삼백여년의 세월이 지나는 동안 燒失(소실) 또는 崩壞(붕괴)돼, 현재는正面七間(정면칠간) 홀치마 팔각지붕의 ∩ 字形(자형)의 正寢(정침)과, 祠堂(사당)과 대문채만 남아 있으나, 특이한 건축양식과 고대건축물로, 경상북도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건축주 여명주의 字(자)는 天與(천여)요 號(호)는 南餘(남여)이다. 公(공) 은 숙종7년 辛酉(신유1681)에 금릉군 구성면 기동 本第(본제)에서 태어났으며, 好學績文(호학적문)하야 繼述家聲(계술가성)하고, 孝友兼全(효우겸전)에 養德林泉(양덕임천)하며, 器局(기국)이 俊豪(준호)하였다.
     
     
    25.景慕齋(경모재)
     

     
    本(본)齋(재)는 工曹判書(공조판서) 克誨(극회)의 次子(차자)인 子庸(자용)을 景慕(경모)하여 후손이 山亭(산정)을 創建(창건)하였으나, 오랜 風霜(풍상)으로 頹落(퇴락)하여 辛丑年(신축년1961)에 현위치로 移建(이건)하여, 金山派祖(김산파조)이신 公(공)을 景慕(경모)하여, 縣額曰(현액왈) 景慕齋(경모재)라 한다.
     
     
    26.祭壇(제단)
     

     
    本(본) 祭壇(제단)은 金山派祖(김산파조)이신 義城縣令(의성현령) 子庸(자용)과, 縣令公(현령공)의 長子(장자)인 金海府使(김해부사) 緝(집)과, 次子(차자)인 通德郞(통덕랑) 熹(희)와, 府使公(부사공)의 子(자) 忠武大護軍(충무대호군) 允成(윤성)과, 通仕郞(통사랑) 九成(구성) 先祖(선조) 五位(오위)의, 祭壇(제단)을 癸酉(계유1933)년에 設壇(설단)하여, 매년 음력 十月(십월)十日(십일)에 墓祀(묘사)를 奉享(봉향)하고 있다.
    27.敦慕齋(돈모재)
     

     
    本(본) 齋(재)는 中始祖(중시조)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의 次子(차자)인 高麗(고려)版圖判書(판도판서)를지낸 諱(휘) 渭賢(위현)과, 判書公(판서공) 次子(차자) 本朝(본조) 工曹判書(공조판서)를 하신 諱(휘) 克誨(극회), 두분을 追慕(추모)하기위해 創建(창건)한 追慕所(추모소)이다. 享祀日(향사일)--陰曆(음력) 10월6일.

      28.固城 縣令公(고성현령공) (휘) 子方 之墓(자방 지묘)
     

     
    三重大匡公(삼중대광공) 次子(차자) 版圖判書公(판도판서공) 諱(휘) 渭賢(위현)의 次子(차자)本朝(본조)때, 工曹判書(공조판서)를 지낸 諱(휘) 克誨(극회)의 長子(장자) 固城縣令(고성현령) 諱(휘) 子方(자방)의 墓所(묘소)
    29.禦侮齋(어모재)
     

     
    本齋(본재)는 八世(팔세) 諱(휘) 從濩(종호) 追慕所(추모소)


    30.檜山齋(회산재)
    관리자 2008-09-01

     
    本齋(본재)는 十二世(십이세) 諱(휘) 孝杜(효두) 追慕所(추모소)



     
    31.縣令呂公孝曾善政碑(현령여공효증선정비)
     

     
    字(자)는 魯而(노이) 號(호)는 西巖(서암) 諱(휘) 孝曾(효증) 公(공)은 圓亭先生(원정선생) 玄孫(현손)으로, 固城(고성)府使(부사) 제직시 善政(선정)을 배풀어 固城郡民(고성군민)이 立石頌德(입석송덕)함


32.月潭精舍(월담정사)
 

 
字(자)는 述而(술이) 號(호)는 月潭(월담) 諱 (휘)孝思(효사) 圓亭先生(원정선생) 玄孫(현손) 公 (공)을 追慕(추모)하는 追慕齋舍(추모재사)이다..
      
       
33.景拙齋(경졸재)
 

 
本齋(본재)는 十四世(십사세)  諱(휘) 得擧(득거) 字(자) 文遇(문우) 號(호) 百拙窩(백졸와). 後孫(후손)이 敬慕心(경모심)으로 齋(재)를 建立(건립)한 追慕所.(추모소)이며 縣額曰(현액왈) 景拙齋(경졸재)다.
 
自少好學至老不倦尤篤孝友鄕黨推重有遺矯以疾終于家
(자소호학지로불권우독효우향당추중유유교이질종우가)

 

34.菊伴齋(국반재)
 

 
本齋(본재)는 十九世(십구세) 字(자) 景膽(경담) 號(호) 菊伴(국반) 諱(휘)應奎(응규).
후손이 追慕(추모)하는 마음으로 建立(건립)함. 縣額(현액)이 菊伴齋(국반재)다.

35.德隱呂先生施德碑(덕은여선생시덕비)
 

 
十九世(십구세) 字(자) 順汝(순여) 號(호) 德隱(덕은) 諱(휘)大驃(대표). 當代(당대) 文章家(문장가)로 德隱文集(덕은문집)이 있다. 先生(선생)은 安東(안동)의 定齋(정재) 柳致明(유치명) 門人(문인)으로, 朱書節要(주서절요) 心經(심경) 近思錄(근사록) 등 학문을, 許傳(허전) 李源祚(이원조) 李敦禹(이돈우) 權璉夏(권연하) 등과 연구하여, 당시에 학자로 이름이 높았다. 당시 敎育長(교육장)인 樂育齋(낙육재)의 초대 講長(강장)으로, 후진을 양성하였으며, 嵋淵書院(미연서원)을 창건하여 유학진흥에 힘썼다.


36.喚惺齋(환성재)
 

 
二十世 字(자)는 致鐘(치종) 號(호)는 惺齋(성재) 諱(휘)大會(대회) 講道之所(강도지소)이다.


 

37.晩松星山呂公東淵公蹟碑(만송성산여공동연공적비)
 


 二十一世(이십일세)諱(휘) 東淵(동연)

 

38.朝鮮義士二隱呂公遺墟碑(조선의사이은여공유허비) 二十一世 彩龍(채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