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사상

국가가 민족 보다 우선한다.

碧 珍(日德 靑竹) 2010. 3. 18. 11:13

    국가가 민족 보다 우선한다.

     

                                 (국가 vs 민족).

     

     

    자유주의는 인간이 욕망을 추구하고 달성하는 과정을 인정하고 인간의 이기심을 본성으로 하는 인간과 그들 단체로부터 도출된 존재가 국가(國歌)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국가가 초월적이거나 신성한 존재는 아니다.

     

    국가란, 무엇이 국가 인가?, 개인이 욕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발생 할 수 있는 외부로부터 간섭과 침입으로 부터 국가의 구성원을 안전하게 보호하고 편하게 살 수 있도록 하는 공권력 즉, 정당한 폭력체인 정치적 기능이다.

     

    그 정당한 폭력체인 국가를 유지하기 위하여 개인은 세금을 내고 개인의 삶의 일부분을 실제적으로 희생을 하며 국가인 요체인 국토를 보존하고 외세의 침입으로 부터 방위요구에도 의무적으로 따른다.

     

    그러므로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민을 명예롭게 대우하고 보상하지 못하는 국가는 존재할 가치가 없는 것이다, 마음에 들지 않은 국가라면 경우에 따라 살기 좋은 타국가로 더 좋은 나라로 이민 가면 되는 실정이다.

     

    우리 주위에도 많은 사람이 외국의 국적이나 시민권을 가진 이들을 볼 수 있다, 탈 국가 내지 탈 민족현상 인 것이다.

     

    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은 가족과 이웃, 언어와 풍속, 외부의 침입을 공동으로 대항해온 역사 등 다양한 문화적 동질성들이 민족(民族)이라는 비슷한 형태로 이루진 사람들의 결사체가 진화한 것이 국가가 생성된 기원이 아닐까 한다.

     

    필연적으로 국가는 영토와 주권 국민이 있어야 국가라 할 수 있다.

     

    근대국가에서는 민족이란 개념은 국가를 구성하는 요소로의 그 의미가 많이 퇴색되어 버린 것이 현 실재상황이다, 하루에도 수십만의 사람이 비자. 여권을 소지하고 이웃나라를 찾아가고 오고하는 세계화(global)의 시대상황에서 생존법칙일 것이다.

     

    작금 시골에서 자라고 있는 혼혈아와 다민족의 결합체로 훌륭한 국가를 이루는 현상은, 더 이상 민족은 영구불변의 초월적인 존재가 아니라 유연하고 유동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하나의 국가가 생성되고 소멸되는 과정은 거의가 전쟁의 진통을 겪어가는 것이 필연적인 것임을 역사는 증명하고 있다.

     

    세계2차대전의 전쟁의 승패의 가름 속에서 많은 신생국가가 생기듯, 대한민국도 그런 혼란 속에 탄생된 국가이다,

    어떤 체제로 국가를 설립할 것인가는 국가의 정체성을 가름 지을 중요한 요소이기에, 대한민국은 미국식의 인간본성을 관통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골격으로 해방 후 무정부상태에서 건국을 하였고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요즈음 이념의 과잉과 혼란이 바로 단일민족을 국가의 단위로 하는 민족국가를 수립하지 않고, 북한은 소련의 하수인 몇몇 인사가, 남한도 몇몇 인사의 마음대로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이 지금 대한민국의 분열의 원인이 아닌가 생각한다.

     

    전 어느 날 국가의 원수이자 행정의 수반인 대통령조차 남한 단독국가의 수립을 부정하는 듯한, 6.25전쟁을 통일전쟁이라는 발언을 하고(치매상태에서 했는지 문제가 생기자 황급히 취소하는 결코 해프닝이라 할 수 없는 해프닝을 일으키고), 또 다른 대통령은 해방 전후사를 읽고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는 반 헌법적인 발언을 하며, 어느 어벙한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어떤 가치보다도 민족이 국가보다 우선한다고 낭독했다니,

     

    이쯤 되면 대한민국에서의 국가는 초월적이라거나 신성하기보다 개 패듯이 두들겨 맞는 신세로, 개굴 창에 처박힌 기분이 든다면 지나친 자학 일까.

    그래서 먹물을 먹었다는 지식인이라는 작자나 학생이던 진보주의자이던, 6.25는 민족해방을 위한 해방전쟁이고 통일전쟁이라고 기고만장하게 떠드는 방종을 용인하는 반역적인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민족이 외세의 약탈과 지배를 받고 지배계급의 수탈로부터 언제 광명의 빛을 만끽한 적이 있는가, 있다면 겨우 우리민족이 해방 후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산업화와 민주화 과정에 누린 광명보다 더 한 광명이 언제 있었던가.

     

    그들이 말하는 우리민족끼리는 국가보다 민족이 상위개념이므로, 언제나 불안전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루면 대한민국은 사라져야 할 지엄한 신탁의 도마 위에 놓인 처지가 되어버린 게 아닌가.

     

    “개인의 자유를 위해 2차적인 합의로 구성한 것이 국가라 하더라도, 국가는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국가의 역사는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 소중하기 때문에 함부로 비판해서는 안 된다. 비판은 예의를 갖춘 다음 최소한의 수준에서 신중하게 제기해야 한다”고, 국가와 역사에 대한 이영훈교수의 지적은 적절한 지적이라 할 수 있다.

     

    역사에 자긍심을 가지는 건강한 국민을 교육하는 일은 국가가 국가로 존립하는 한 포기 할 수 없는 의무와 같을 것이고, 그 기준의 부합과 부적합이 선진국의 기준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편적이다.

     

    모든 국민은 법 앞에서 평등하며, 사회적 신분으로 차별을 받지 않는다고 헌법에 명시되어있는 것이 자유민주주의 기본정신이다.

     

    그러기에 정당방위가 아닌 한 개인이 개인에게 행사하는 폭력은 금지하며, 국가를 공권력을 가진 정당한 폭력체로 인정 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국민들은 국가에 세금을 내고 권리. 의무를 가지는 것이다.

     

    국민은 안전하고 차별 받지 않고 살 수 있도록 국가만이 정의로운 폭력을 행사해 달라고 국민 누구나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는 것이다.

     

    지난 10여년 죄파 정부시절에 그 권리가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엇다, 노사 간의 계급대립이 일어나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가기간 산업과 대한민국의 부를 창출하는 몇 안 되는 기업에 대해 무차별 폭력을 행사하여 기업 활동을 위축 마비시켜 천문학적인 손실을 발생시키는 것이 현실이다.

     

    그 당시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세계적인 조강기술이 가진 기업으로 일급비밀인 정보가 망가지고, 계급투쟁의 폭력배들에게 일주일간이나 점거된 사실이 메스콤을 통해 보도되고 있는 현실이며, 신 일본제철보다 앞선 기술이라 아려진 그 정보가 적대적인 경쟁기업에게 넘어가지 않았다고 그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기업의 비자금 조성과정에 불법이 있었다고 기업인이 기업을 두고 어디를 갈까봐 조바심을 내며, 기업의 총수와 재벌에 휘둘리지 않는다는 공권력의 독립을 자랑하는 알량한 명분으로 대한민국의 초유의 총수를 구속을 강행한 공권력은, 바로 그 구속된 그 기업주 소유인 기업이 공권력 요청에는 어떤 중요한 일이 있었기에, 노조가 불법파업으로 일조원 이상의 손실을 발생 할 때까지 노조원의 폭력을 외면하고 먼발치에서 강 건너 불구경이나 하듯 방관하는 것을, 국민은 어떻게 국가 공권력을 믿고 그 정당성을 어떻게 이해 할 수가 있겠는가.

     

    그들의 국가관에는 국익의 개념이 있기나 하는지 의심이 나기도 한다, 기업들은 더 이상 정당한 국가 폭력체가 연체동물처럼 흐늘거린다면 이런 정부를 도저히 믿을 수 없어 본사를 외국으로 옮긴다는 가슴 아픈 소리가 들릴 때, 그들의 표정이 어떻게 변하며 무슨 궤변을 하는가를 지켜보는 것만이 국민이 할 수 있는 일인가.

     

    이미 국회의 의결로 결정된 평택의 미군기지 이전에 폭동을 목표로 덤비는 그들에게, 이 나라는 국가의 이익보다는 계급의 이익과 민족의 이익을 우선하는 것 같이 보인다, 이 사실은 공권력과 군이 엄청 짓밟히고 유린당하고 있다 할 수 있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말과 표정에는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진정한 민주화고 우리민족의 자주통일이라고 주장하는 야릇한 모습이 우리 국민을 전율하게 함은 어느 누구의 혼자만의 느낌은 아닐 것입니다.

     

    도대체 한민족끼리 60여년이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통신과 왕래마저 막고 사는, 전대미문의 폐쇄적인 북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반세기이상을 이질적인 문화와 문명의 차이를, 어떻게 낮은 단계의 교류로 통일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는지 이해하기가 참 힘 든다.

     

    그거야 말로 참으로 문명과 비문명의 크고 많은 충돌이 예견되지 않는가.

     

    한민족이라 하드래도 무조건의 감싸기와 퍼주기는 북한이 자립할 자존심을 망가뜨리고, 부끄럼 없이 구걸하고 뻔뻔함을 키워 가지게 했다, 그 책임은 모두가 남한의 민족주의자들의 잘못이라는 지적에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 까.

     

    도리어 달라고 원하는 것을 주지 않을 때, 자식이 부모에게 폭력을 휘두르며 협박을 하는 패륜을 저지르는 거와 무엇이 다른가,

    민족공조(民族共助)라는 허울로 포장한 균형자로는 국제적 고립을 자초하여, 해외로 밖으로 나가야만 수출하여 먹고 살 수 있는 대한민국의 입지를 얼마나 축소시키고 있는지 생각해본 일이 있는가.

     

    개인보다 국가를 우선시하는 행위도 파시즘이나 국가주의로 기우는 위험을 부르지만, 계급보다는 국가의 이익이 우선시되는 것이 공공성이 합리적이며 민족보다는 국가 대 국가의 단위가 이성적이며 실리적이고 소중한 국가를 지키는 길인 것이다.

     

    국가(國家)와 민족(民族) 그리고 계급(階級), 이 셋 중에 지금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금의 세계 여러 나라들 중에서 민족개념을 우선시 하는 나라보다, 국가개념(國家槪念)을 우선시하는 나라의 국민이 보다 안전하고 행복하며 개인의 능력을 소신껏 발휘하고 개발할 수 있도록 하는 국가임을 잊어서는 안니 된다.

     

    국가(國家)가 민족(民族)보다 상위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碧 珍.

     




▲베르디 - 개선 행진곡 Verdi : Triumphal March / cond. Efrem Kurt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