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를 통한다면.
우리가 가끔 朴 道士니 李 道士 하며 장난기 투의 말부터, 열심히 책을 읽고 산 깊은 곳에서 수련하다가 도를 통했다는 진지한 말을 우라는 들을 때도 있었을 것이다.
道가 무엇이며,“道를 통하면 어떻게 되는가”, 여섯 가지의 신통력(神通力)을 가지게 된다고 한다? .
佛敎에서 붓다가 신격화 되면서 따라, 현저하게 종교적 의미를 가지게 되어 佛典에 세존(世尊)이라고 칭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온갖 공덕을 갖추어 일체중생을 이익하게 하여 세상에서 존경받는 까닭에서 이름이 붙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복혜(福慧)의 무한한 공덕으로 10가지 이름을 성취하였으며, 그중 명행족(明行足)이란 如來十號 중 한 명호이다.
부처님은 三明六通을 모두 얻었기 때문에, 훤히 알고 행하는 것마다 부족한 것이 없다, 즉 명행이 구족했다 함은 戒.定.慧, 三學에 의해 바른 깨달음을 얻으셨다는 말이다.
보통사람 상식의 세계에서 헤아릴 수 없는 것을 헤아리고, 걸림이 없는 것을 三明六通이라 하며, 헤아림은 神이라 하고, 걸림이 없는 것을 通이라 한다.
三明은 숙명통(宿命通).천안통(天眼通).누진통(漏盡通)이고, 六通은 삼명에다 천이통(天耳通).타심통(他心通).신족통(神足通)을 더한 것이다.
宿命通은 육도를 윤회하는 모든 중생들의 前生.今生.後生의 일을 안다는, 즉 남의 속을 잘 안다는 신통한 지혜의 힘이다, 전생을 알면 금생을 알 수 있고 후생도 알 수 있는 것으로 과거세의 인연을 아는 것이다.
天眼通은 멀고 가까움과 크고 작은 것에 걸림이 없이 무엇이나 밝게 본다는, 즉 미래세(來生)의 과보를 아는 신통한 지혜의 힘이다. 서울에 앉아서 남해에 있는 아우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토정비결(土亭秘訣)의 저자 土亭 이지함(李之菡)에 대하여 안다면, 천안통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漏盡通은 번뇌 망상이 완전히 끊어진 것이다 는, 즉 명상에 들어가는 신통한 지혜의 힘이다. 다시 말하면,“새는 것이 다 끝난 경지”가 누진통이며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누진통은 좁은 의미로 말하면 성욕을 극복한 경지를 말하며, 몸의 정액이 새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며, 심하게는 땀도 콧물도 잘나지 않는 것을 말하며, 누진통의 경지가 되면 신체의 변화가 일어나는데 남자의 생식기가 번데기처럼 줄어드는 현상이 되는데, 이는 생식기에 몰려있는 양기(陽氣)가 머리로 다 올라가기 때문이며,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마음장상(馬陰藏相)이라한다.
기회가 있어 국립박물관을 갈수 있다면, 전시하고 있는 고려 태조상에서 볼 수 있는 조그마한 생식기의 모습은, 바로이것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天耳通은 멀고 가까움과 높고 낮음에 걸림이 없이 무슨 소리나 잘 듣는다는, 즉 하늘의 눈으로 모든 것을 거침없이 꿰뚫어 듣는 신통한 지혜의 힘이다, 다르게 말하면 하늘 천상계의 소리를 듣는 능력이다.
우리가 잘 아는 악성 베토벤.바흐.모차르트.브람스.차이콥스끼 등은 천이통에 가까운 사람들이라 하고 싶다.
他心通은 어떤 중생이라도 생각하는 바를 다 알 수 있다는, 즉 지나간 일을 아는 지혜의 힘을 말하며,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지혜의 능력이다.
타심통이 열린 사람(큰스님. 도사?)과 대화를 할 때는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대하여 한다, 자기 욕망을 들어내는 게 좋은 대응방법이며 숨기려고 하면 대화에서 멀어 진다.
神足通은 공간에 걸림이 없이 왕래하며 그 몸을 마음대로 변화할 수 있다는, 즉 여러 가지 몸을 나타낼 수 있는 신통한 지혜의 힘이다.
전해오는 옛 이야기 중, 어느 누가 하루 밤사이 星州에서 智異山 쌍계사를 다녀왔다니, 大邱에 아침나절에 있던 사람이 全州에서 점심을 먹고 있다는 등, 이와 같은 말은 바로 축지법(縮地法)으로 신족통의 한 현상이고 이런 말들이 역사상 많이 전해오고 있으며, 한말에 보부상으로 정승반열까지 출세한 李용익과 지리산에 開運도사의 설화가 전해오고 있는데 흥미로운 일이다.
道는 어디에 있는가? 하고, 한 선객(禪客)이 흥선선사(興善禪師)에게 물었을 때,
“道는 어디에 있습니까?
눈앞에 있느니라.
그러면 왜 저에게는 보이지 않습니까?
너에게는 나(我)가 있기 때문이다.
저에게 나가 있기에 보지 못한다면 스님께서는 보이십니까?
네가 있고 내가 있으면 더 더욱 보지 못한다.
저도 없고 스님도 없다면 볼 수 있겠습니까?
너도 없고 나도 없는데 누가 본단 말이냐?”
왜 눈앞에 있는 道. 眞理의 세계가 보이지 않을까?, 우리 중생이 다생겁래(多生劫來)로 我相에 집착하여,“너와 나”를 二元化하여 차별하는데서 점점 道와 멀어지며, 몇 생을 다지고 다져진 我相이 버티고 있으니 道를 볼 수 없는 것이다.
너나 나니 하는 我相을 무너뜨리면, 애써 닦지 않아도 道(실상)는 스스로 들어나고, 我相을 이유 없이 버리고 下心으로 살아 갈 때는 만 가지 복락이 구족하게 된다.
진정으로 道를 보고 싶은가? 그렇다면 부처님께 귀의하여, 불경공부 기도정진을 열심정성으로 하여 참 불자가 되어야하고,
참으로 道(진리. 참된행복)를 얻고자 하는 마음은, 일체의 差別心을 이유 없이 버리고 無心의 세계로 돌아가면,
“그대 자신이 바로 道라는 사실을 깨달게 되고”통속적으로 道를 통했다란 말이, 실체 없는 허구이고 어디까지나 말이란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새벽 무렵에도 창을 두드리는 장대 빗소리는 그리움으로 파란물이 든 방으로 憬아를 부르는 메아리가 되어 가는구나.
碧 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