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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근혜-親朴계 지원 속, 起死回生 한 朴희태.

碧 珍(日德 靑竹) 2009. 10. 31. 07:02

    朴근혜-親朴계 지원 속, 起死回生 한 朴희태.

     

     

     

    10.28 재.보선을 통하여 李명박 정권이 단순히 5개 선거구 중 2개만 이기고 나머지는 野黨에 패하였다고 해서가 아니라, 黨力을 집중한 경기 水原에서 패하였고 또한 텃밭이라고 하는 경남 梁山에서도 전 黨 代表가 출마하고도 힘겹게 승리하였기에 與黨-政府은 입이 열 개라도 有口無言 하여야 하듯이 국민으로부터 준엄한 심판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이 패배한 이유는 크게 본다면 政府는 이미 공사 중인 세종시의 성격 변경을 시도하고 있는 것과, 國民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4大江 사업을 밀어붙이고, 또 용산 참사도 지금껏 해결책을 찾지 못하는 등 국정 운영능력 부족을 드러내고 있음이 분명하며, 특히 李 대통령이 최근 표방하고 있는 庶民정책이 여전히 신뢰를 주지 못하고 있기에, 이번 선거결과는 政府-與黨의 일방적인 國政運營 때문이라고 도 볼 수 있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러기에 政府-與黨이 할 일은 재.보선 결과를 평가 절하할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刻苦의 自己反省과 더불어 표심로 나타난 國民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선하여 헤아리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경남 梁山에서 10.28 재.보선에 출마한 朴희태 전 대표는 지난 88년 13대 총선을 통하여 정계에 입문하여 17대까지 5선을 기록한 관록의 政治人으로, 名 代辯人으로 이름을 날렸고 계파갈등으로 비걱거려온 한나라당의 수장으로 활동하여 온 黨 代表를 거친 巨物 政治人이라는 점에서, 無名 政治新人에 가까운 宋인배 민주당 후보와는 지명도에서 비교가 되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10.28 재.보선에서 水原 장안과 더불어 최대 격전지였던 경남 梁山에서 朴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가 진땀을 흘리면 승리를 거두었다. 즉 朴 전 대표는 선거 초반에는 손쉬운 낙승이 예상되었으나 의외의 고전으로 이번 재.보선에서 3만801표(38.13%)를 득표함으로, 의외로 선전한 宋인배 민주당 후보가 2만7502표(38.13%)를 얻으므로 민주당 후보 보다 불과 4% 포인트 정도 앞선 승리인데, 이를 생각하면 경남 梁山이 한나라당의 政治的 텃밭이기에 黨이 모든 火力을 동원하고 총력지원을 펼쳤기 때문에, 텃밭인 영남에서의 선거라고 하기에는 다소 찜찜한 선거 결과이다.

     

    이번 梁山 재.보선에서 한나라당 朴 전 대표는 문제는 무엇보다도 공천결과에 반발한 金양수 전 의원이 무소속 출마를 선언한데다가, 친여 성향의 유재명 후보도 무소속 출마를 하므로 여권표가 분산된 것과, 민주당에서는 梁山이 뒤집어 진다는 것과 더불어 투표율마저 43.9%를 기록하여 이변이 연출되는 것 아니냐는 전망까지 나오므로, 경남 梁山 재.보선의 승리를 토대로 재기를 노리는 親盧진영 인사들이 宋 후보를 총력 지원하면서 재.보선 후반 선거판세를 급박하게 변화하였던 것이나, 그렇지만 朴 전 대표는 강력한 조직 표를 바탕으로 거센 추격을 따돌렸던 것이나, 재.보선 초반 예상과는 달리 朴 전 대표는 피 말리는 접전을 펼쳐왔던 것이다.

     

    朴희태 전 한나라당 대표가 5선으로 국회부의장을 역임하였었고 李명박 캠프 선거대책위원장 등의 화려한 경력으로 18대 국회의장 감으로 0순위로 거명되었던 그였지만, 18대 공천 낙천파동을 거치면서 院外代表의 설움까지 맛본 끝에 먼 길을 둘러 千辛萬苦 끝에 여의도로 다시 국회에 복귀하였다. 즉 黨 內外에서는 朴 전 대표의 귀환에 대하여 정말 멀고 험한 길을 거쳐 살아 돌아왔다고 평하고 있는 가운데, 한편 의사당에 복귀한 그는 黨內 最多選인 6선으로 18대 후반기 국회의장 0순위로 거의 확실시 되고 있다.

     

    朴희태 당선자는 본래 지역구는 南海-하동이기 때문에 따라서 梁山으로 옮겨 출마해야 하느냐를 유권자들에게 설득하기가 쉽지 않는데다가, 한편으로 黨內 親李 主流 일각에서는 黨 代表가 출마하는 것은 정권에 대한 審判的 성격이 있기 때문에 패배할 경우 부담이 너무 크다며 주저앉히려는 움직임까지 있었으며, 또한 國會議長 욕심 때문에 黨을 망친다는 일부의 비난도 들어야 하는 등 이번 재선거에 나서는 과정부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朴 당선자는 오히려 집권당 대표 premium을 위해 대표직을 갖고 출마하는 방안을 추진하는 등 정면 돌파하였으며, 모든 굴욕을 忍耐하며 여의도 捲土重來만 염두에 두고, 결국 9월 7일 平 黨員으로 돌아가 당당히 공천심사를 받겠다며 대표직을 던진 1주일 뒤 겨우 공천장을 받았고, 더욱이 한나라당 텃밭인 慶南이긴 했지만, 공천에서 탈락한 金양수- 유재명 두 무소속 후보가 여권 성향 표를 잠식하였었으며, 또 盧 전 대통령 고향인 옆 동네 金海로부터는 민주당 후보를 돕는 친親盧 바람이 불었기에 선거과정도 쉽지 않았다.

     

    그런데 朴희태 당선자가 모든 어려움을 극복하고 마침내 국회로 복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그가 黨 代表가 아니었다면 親李-親朴 한 지붕 두 가족인 한나라당은 일찌감치 분당되었을 것이라는 黨內 의원들의 평도 朴 당선자에게 힘을 실어주었고, 또한 그가 親李 主流였음에도 불구하고 親李 주류에게 팽 당하는 듯한 모양새가 黨內 공천과정에서나 선거과정에서 볼 수 있었으나, 親朴계의 대대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을 받은 것 때문이라고 보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며, 또한 朴희태에게 한 번 더 기회를 줘야 하지 않겠느냐는 黨內 정서도 한 몫 하였다고 볼 수 있다.

     

    한편 親朴 인사들은 그간 朴희태 전 대표 출마 시 현지에 내려가 적극 돕겠다고 공언하여 왔으며, 또한 親朴계가 朴희태 전 대표를 강하게 밀고 있는 상황에서 비슷한 조건의 상대 후보를 선택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에, 朴 전 대표 공천은 黨內 갈등을 최소화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저변에 깔려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기에 朴 전 대표는 이에 힘을 얻어 정치권 중진으로서 저력을 보인 이번 재.보선을 통하여, 그동안의 마음고생을 털어내고 李상득-홍사덕-鄭몽준과 더불어 당내 최다선인 6선 의원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는 게 다행스럽고, 그는 나아가 입법부 수장인 국회의장의 유력 후보로 물망에 오르므로 명예회복의 확실한 발판을 마련한 것이 되었다.

     

    朴희태 黨 代表가 지난 14개월 前을 되돌아보면 政治입문를 하고부터 지금처럼 참으로 억울하고 서러워 할 일이 없었다고 생각된다. 즉 마지막 政治 人生을 10월에 열릴 경남 梁山 재선거를 통하여 무난하고 후회 없는 유종의 미를 거두려는데, 朴 대표는 親李계로 그것도 대선당시 최종 의사결정을 도맡았던 6人會 member인데도 親李 주류 측에서는 공천에 曰可曰否하며, 또한 梁山 출신 전직 의원은 일찌감치 지역에 내려가 朴 대표를 견제하고 있어, 그러기에 홀홀 단신으로 남의 일처럼 첩첩산중에 있는 모양새로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는 고립무원인 것 같아 보였으나, 朴근혜 전 대표와 親朴계의 따뜻한 지원이 그를 再生의 길로 인도 한 모양새가 되었었다.

     

    또한 朴 대표가 억울하고 서러웠던 것은 이번만이 아닌데, 그를 國會議長감으로 점찍어 놓고도 공천심사위는 民主黨이 改革 공천이니 刷新 공천이니 하면서 한나라당을 압박하여오자, 무조건 바꾸는 것이 개혁이고 쇄신인지 경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를 빌미로 그를 낙천시켰던 18대 총선 공천 때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을 것이다. 그때 朴희태 전 대표를 배제하면서 朴근혜 전 대표와 가깝던 金무성 의원 등도 동반 배제되었던 것이며, 이어 親朴계가 殺人 공천으로 대거 낙천되자 朴근혜 전 대표는‘나도 속고 국민도 속았다’고 말하므로, 이로 인하여 主流와 非主流 즉 親李-親朴의 갈등이 지금까지 이어지는 출발시점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朴희태 대표는 자신도 정권 창출에 기여하였었고, 1년 2개월간 집권여당을 운영했으니까 떳떳하게 심판을 받겠다며 출마 의지를, 李 대통령과 만나 자신의 뜻도 전달하며 확실히 밝혔으나, 현실적인 상황은 여권 핵심부는 朴 대표가 출마를 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인데, 그래도 출마하겠다니까 黨 代表가 나가면 정권 심판이 되니 대표직을 사퇴하라고 야박한 말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유일하게 손을 내어 밀 곳은 親朴계인 것 같아 보였으며, 그는 黨內 갈등 해소와 화합의 차원에서 자신이 앞장서 복당시켰던 親朴계도 화끈하게 지원하겠다는 결과가 나왔었기에 이번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