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문. 편지글.

부처님 오신 날 단상.

碧 珍(日德 靑竹) 2019. 5. 18. 00:11

 

 

 

 

부처님 오신 날 단상.

 

 

 

 

 

     어머님을 생각하다가 지난 날 글이 생각나 적으니.

 

구름 한 점 없는 여름입새 / 산산한 바람 이는 날에

    욱어진 푸른 가지 위 / 까마귀 울음소리 들으며

    山居에 오르니 / 눈에 어머님 그리움이 앞서니

    悠長(유장)하게 흐른 歲月 / 함께한 지난날 아쉬움에

    눈시울에 어머님 사랑이 / 주렁주렁 어머님 사랑 맺힌다네.

                                  <어머님 사랑 맺힌다네. 졸작에서>

 

지난 4월 아버님의 忌日을 지나고부터 어머님이 그립고 보고 싶어 5월 첫날 경기 광주 오포읍 문형리 山居에 다녀왔는데, 요즈음 들어 늘 보고 싶어 지난 몇일전에도 山居에서 잠시 뵈었으나 부처님 오신 날이 다가오니 山居에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기에 가기로 마음 정하고, 지난해처럼 오는 부처님오신 날은 서울 조계사(曺溪寺)에서 부처님을 뵈옵고 기원하리라 생각하였었다.

 

세월이 유수와 같이 흐른다더니 벌써‘부처님 오신 날’이 몇 날 앞으로 다가 왔다고 생각하니, 山居에 계시는 父母님들 사랑이 그립고 보고픔도 간절하여 문형산리 山居를 갈려고 기차표를 에매하였다.

 

차안에서 이 저 생각에 잠기다가, 나(我)라는 存在는 무엇일까?. 그러기에 광막한 우주공간에 나는 과연 얼마만한 크기의 존재일까?, 영겁의 시간흐름 속에서 나는 과연 얼마 동안이나 사람으로 살다가 가는 것일까?, 세속적인 부귀영화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을 던지고 이에 대한 대답을 얻어 내려고 얼마나 많은 옛 선비나 그는 고심하여왔던가. 그래서 누구는 사람의 일생을 千里馬가 문틈 사이로 지나가는 것과 같다하였고, 누구는 바닷가에 한 톨 모래알과 같다하였으며, 부귀영화는 뜬 구름과 같다고 하였는데, 과연 너와 나는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일까?.

 

차창 밖 하늘에 얕은 흰 구름이 깔려 있으나 벌써 햇빛은 싱그러움을 지나 따가운 날씨인데, 시원한 바람이 불어 기분을 상쾌하게 하여 주는 날이라 그런지 아련하게 다가오는 그리움이 가슴 가득하니 아름답고 무한한 행복감을 맛보게 하여준다, 과연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무엇일까?, 바로 마음이 아닐까 생각하고 싶어진다.

 

우리 사람의 아름다움에 있어서 육신의 아름다움도 아름답다고 하지만, 진정한 아름다움은 사람으로부터 멀리 있는 게 아니다, 생각하기에 육신이 덮고 있는 마음(心)이 아름다운 것이 진정한 아름다움이다, 비록 육신은 다소 추하다 하지만 이 세상을 사는 많은 삶들 중에는 아름답고 진솔한 생각을 마음이란 그릇에 고이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 많기에 사람 사는 세상이 그래도 아름다운 것이며, 이 마음의 아름다움이 우리의 소박한 참 아름다움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서울을 올라온 다음날인 오늘은 부처님 오신 날이라 조계사(曹溪寺)에서 경축 법회에 참석하려고, 오전 12시에 서울 인사동 조계사 앞에 도착하니 이미 신도님들로 인하여 번잡하기가 말로서 표현하기도 힘들 지경이었기에, 줄을 서서 어렵게 조계사 대웅전에서 부처님을 뵈올 수가 있어 삼배 올리면서반야(般若)의 지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空으로 파악되므로, 결국 空의 상태에 이룰 있는 중생은 자연히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는 사상이 현재까지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은, 즉, 결국은 佛敎의 目的은 般若의 完成으로 귀결하기 때문이다는 부처님의 말씀을 다시 한 번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기에 마음은 편안하였다.

 

어느 종교나 자신의 신앙은 절대적으로 소중한 것이고 남에게 양보할 수 없는 것으로, 모든 종교가 선교나 포교에 열심인 것도 자기 신앙에 대한 확신을 토대로 하고 있으나, 다른 종교를 차별하거나 핍박하면서까지 자기 종교를 높이고 퍼뜨리려 하면 종교 간 평화에 금이 갈 수밖에 없다. 그러기에 종교인들은 자기 믿음에 대한 확신을 다른 종교를 비하 하는 방식으로 전하는 것을 절대 피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부처님 오신 좋은 날인데 조계사 일주문에서 50m여 앞에 기독교 신자 10여명이, 십자가를 그린 옷을 입고 피켓과 완장에다 메가폰으로 예수를 믿으라고 거리방송을 하므로 불교 신도들이 철수를 종용하고 있는 장면은, 참으로 꼴 보기 사나운 꼴불견이라 예수를 믿으려면 좀 제대로 믿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이는 오래전 부처님 오신 날 대구 팔공산 갓바위에 부처님 뵈옵기 위해 가는데 갓바위 바로 밑 주차장에 내리자마자‘예수 믿으세요’하며 교회선전 물과 사탕을 주는 행태를 본 이후 10여년 만에 조계사 앞에서 다시 보게 된 행태라 어이가 없다고 하겠다.

 

조계사 뜰에서 남쪽 하늘을 처다 보다가 문득 그 사람 떠올라 적어 본다,

 

지금은 당신과 나, 늘 함께 하기 위하여서는

    어려운 여건과 기약 없는 기다림을 마다하고

    지나온 인연을 지나 온 생각들을, 그 모두를

    당신을 위하여 하얗게 지우는 게 염원입니다.

                                           <내 염원(念願)은, 졸작에서>

 

지금 왜? 그가 당신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을까, 아마도 그는 당신에게 아무 말 없이 미소로 답할 수 있고 둘보다는 하나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며, 당신보다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 수 있는 그런 옆에 있는 참 사람이고 싶으며, 아무 말이 없어도 같은 것을 느끼고 설령 그를 속인다 하여도 전혀 미움이 없으며 당신의 나쁜 점을 덜어줄 수 있는 더 소중한 옆에 있는 사람이고 싶고, 잠시의 행복이나 웃음보다는 가슴깊이 남을 수 있는 행복이 더 진솔한 옆 사람이 되고 싶기 때문이라고 하면 진솔한 마음일까 자신에게 自問自答하여본다.

 

찾는 이 없어 寓居가 무섭도록 적막한데

    혼자 想念에 잠기어 앉아서

 

    이 책장 폈다가 저 책장 덮기도 하다

    한소리 읊으니 적적함 더 하는데

 

    어느 누가 외로움을 즐기는

    혼자만의 心情을 알아 同行 하여 주려나.

                                          <孤獨한 同行, 졸작에서>

 

마음을 맑게 세상을 향기롭게 하는 부처님 오신 날에 당신에게 이 글과 사랑을 보내 드립니다.

 

                         나무관세음보살. 日德 碧珍 合掌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