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사상

[스크랩] 呂氏鄕約(여씨향약)과 月會堂(월회당).

碧 珍(日德 靑竹) 2010. 4. 23. 15:50

 

                                                                                               月會堂

     

    呂氏鄕約(여씨향약)과 月會堂(월회당).

     

     

                                                          月會堂 전경

     

    大邱에서 가까운 星州군 碧珍(벽진)면 樹村(수촌)里(海平里.1990.4월 행정구역 명칭변경)의 下樹村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鹽田鄕約(염전향약.呂氏鄕約)의 실행과 후진에게 경학(經學)과 의례의 법을 강(講)하기 시작한 수촌리에는 月會堂을 비롯한 齋室이 11곳이나 모여 있으며, 星山(碧珍)呂氏 集性마을로 옛날에는 거의가 呂씨들만 살아 왔다, 이러한 집성촌이 우리나라에도 지방 도처에 지금도 많이 남아있다.


    향약을 간단히 적어보면,“향약(鄕約)”이란 지방자치지역의 덕목규약(德目規約)인데, 그 시초는 중국 北宋 말에 섬서성 염전현(鹽田縣) 呂氏門中의 道學으로 명성을 떨친 여대충. 대방. 대균. 대임 네 형제가 문중과 향리를 선도 교화하기 위해 주자학을 바탕으로 만든 규약이다.

     

    우리나라에서는 中宗때, 대사헌 조광조. 대사성 김식의 진언을 받아 들여 전국으로 반포 시행되었으며,


       그 조목(條目)은  1. 德業相勸(덕업상권)  2. 過失相規(과실상규)  3. 禮俗相規(예속상규)  4. 患難相恤(환난상휼)로 되어 있다.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 890-3 에 있으며, 건물은 앞면 7칸·옆면 1칸 규모의 月會堂(월회당)은, 앞면 3칸·옆면 1칸 규모의 전사청, 앞면 4칸·옆면 1칸 규모의 교직사와 솟을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조선 전기 문신 呂희림(1481∼1553)이 呂氏鄕約(여씨향약)을 교육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 조선 중종 11년(1516)에 세운 것을 현종 5년(1664) 呂희림의 자손 呂효회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呂氏鄕約 강당인 동시에, 1919년 파리만국평화회의에 보낼 ‘파리장서’를 써서 宋준필. 金창숙.·呂상윤 등이 서명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역사적으로 뜻 깊은 곳이기도 하다.


    여씨(呂氏)는 원래 중국의 성씨이며, 주나라 무왕이 개국공신이자 전설적 인물인 강태공 망(望)을 여(呂)에 봉하고 호를 여상(呂尙)이라고 하자 후손들이 성을 呂씨라고 했으며, 그의 후손 呂불위의 아들 呂영은 중국을 통일한 진시왕 이고, 진시왕에게는 아들 여부소와 여호해가 있었으며, 여부소는 아들 여몽과 여자앵이 있었는데, 여몽(呂夢)의 후손 여어매(呂御梅)는 당나라 회종 때 한림학사를 지내었는데, 그 뒤 황소의 난을 피하여 877년(신라 헌강왕 3년) 신라에 들어 와서 전서를 지내고 성주군 벽진면에 대대로 살게 되어 그 때부터 우리나라 呂씨가 시작되었다.


    여어매의 두 아들은 고려 때 대장군을 지낸 呂임청과 낭장을 지낸 呂광유 형제가 있었는데, 呂임청의 후손으로는 呂양유, 呂자열, 呂자장, 呂자혁이 으로, 呂양유는 성주에 자리 잡았었고 아들 여위현(呂渭賢)은 고려에서 판도판서를 지냈고 문장이 뛰어났던 손자 여극회(呂克誨)는 조선에서 공조판서를, 5세손 여문승(呂文承)은 사복시정을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


    星山 呂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시조의 7대손인 원정(圓亭) 여희림(呂希臨)이며, 중종 2년에 생원시에 합격한 그는 왕자사부(王子師傅)가 되었으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와 도의로 사귀었다.


    중종 28년 김안로가 경빈박씨(敬嬪朴氏)를 폐하고 복성군(福城君)을 영일에 유배할 때 전에 스승이었다는 이유로 기장에 유배되기도 했다. 다시 기용되어 사헌부지평을 역임했던 呂희림은 성주(星州)에서 정주학(程朱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했다.


    특히 남전향약(藍田鄕約)을 시행하기 위하여 월회당(月會堂)을 일으켜서 향약의 보급자가 되었으며, 현재 월회당은 경북 성주군 벽진면 수촌리(야동)에 있다.


    呂광유의 계통으로 呂자장, 呂자혁은 함양(咸陽)에 자리를 잡았으며, 한편 고려시대에 공조전서를 지낸 여어매(呂御梅)의 9대손인 여칭(呂稱) 이후 많은 명신을 배출하였는데, 呂칭은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 조선 태조 때 도총제, 형조판서를 역임했으며 청빈하기로 이름났으며, 그의 증손 여자신(呂自信)은 성종~중종대에 걸쳐 이름난 무신으로 병조판서를 지내고 청백리에 올랐다.


    呂칭의 8대 손인 여우길(呂祐吉)의 대를 고비로 선조~숙종 대에 걸쳐 가장 위세를 떨쳤으며, 呂우길은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역임하고 광해군 때 관찰사에 이르렀고, 대명외교에 공헌하고 임진왜란 뒤에는 일본에 건너가 중단된 국교를 회복시켰으며, 특히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은 呂우길의 11대손이다.


    呂유길은 선조 때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광해군 때 병조참판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여이징(呂爾徵)은 인조 때 문과에 급제한 뒤 대사헌. 도승지. 부제학 등을 지냈고, 呂이징은 성리학에 밝고 천문. 역법(曆法). 시문. 서화에도 뛰어났으며, 그의 종제(從弟) 여이재(呂爾載)는 인조 때 문과에 급제, 심기원이 모반하였을 때 공을 세워 영국공신(寧國功臣)에 책록 되고 형조판서에 이르렀다. 또한 상신 여성제(呂聖齊)는 소론의 한 사람으로, 영의정에 이르렀다가 남인과 의견이 맞지 않아 중추부판사로 전임했었다.


    星州呂씨와 咸陽呂씨는 성산여씨족보(星山呂氏族譜)와 함양여씨족보(咸陽呂氏族譜)를 대동합본하여 呂씨전국종친회를 조직하였으며, 呂씨는 咸陽과 星州의 2본이 주종을 이루며 나머지 본관은 대부분 咸陽呂씨와 星州呂씨의 세거지를 나타낼 뿐이다.


출처 : 내 가슴이 너를 부를 때
글쓴이 : 벽 진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