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한국불교, 왜 거리에 나섰는가?

碧 珍(日德 靑竹) 2008. 11. 30. 16:01

한국불교, 왜 거리에 나섰는가?  

 

                                              청석골(문경 천주사 주지).

 

 

지난 27일 ‘범불교도대회’가 열리고 아직도 이명박 정부는 이렇다 할 어떤 조치도 반성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저께 초하루에는 전국 1만여 개의 사찰에서 이명박 정부의 규탄 법회를 가진 모양입니다.


추석 이후까지도 이렇다 할 가시적 조치나 반성이 없으면 대구 경북을 시작으로 지역별 ‘불교도대회’를 열어 종교편향에 대한 국민적 저항을 일으켜 나갈 것이며, 나아가 전국 ‘대승려대회’도 열겠다는 것이 조계종의 공식 발표였습니다.


혹자는 수도하는 승려들이 거리로 나오는 것은 보기에도 그렇고 수행자의 본 모습을 벗어난, 부처님의 참 정신과는 전혀 다른 반불교적인 모습이 아니냐고 꾸짖고자 하는 소리도 들립니다.


하지만 그러한 시각은 존재와 삶의 현상을 전체적으로 파악코자 하는 자세가 아니라 자기 위주의 해석으로 치우친 편견, 편향일 뿐입니다. 그러한 시각과 생각이 바로 종교편향이라는 사회적 분란을 만들고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 누구에게나 이상적인 세계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니, 어떤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고 갖는다는 것은 삶을 향상시키고 발전시키는 바람직한 일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그 이상적인 세계가 있은 후에는 어떻게 이상적인 생활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어떻게 해야 공허하고 아득한 이상을 사실로 이룰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출세간적 생활을 이야기하기 전에 먼저 우리들이 사는 사회생활이 무엇인가를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불교에는 사회를 떠나서 수행만 하는 출가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남아 생활하는 불제자가 더 많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그 사회와 시대의 환경에 영향 받을 수밖에 없고, 출가자 또한 구경에는 서로 다른 자리가 아닌 근본 입각처로 환귀본처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회는 물론, 존재의 세계란 서로 의존하고 관계하는 바로 연기(緣起)의 세계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들이 집에서 또는 사회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의∙식∙주∙행이며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이는 등, 모든 것이 비로 입세간적인 생활입니다. 그러면 사회생활 속에는 어떤 내용들을 담고 있는가를 한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사회생활은 물질을 벗어날 수 없는 생활입니다.


사람들의 생활은 물질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생활 속의 행동, 머물고, 앉고, 눕는 등 어느 한 가지도 물질과 관련 없는 것이 없습니다.


생활에서 물질이 빠질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기꺼이 또는 어쩔 수 없이 물질의 노예 아닌 노예가 되어 이익과 손해에 대하여 웃고 울면서 서로 차지하고 갖기 위한 몸부림을 버리지 못합니다.


둘째, 사회생활은 감정을 필요로 합니다.


흔히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합니다.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추구하고 지키며 실현하기 위해서는 감정이 없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감정은 자신의 존재와 가치를 알리는 수단과 방편이 되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사는 절에는 진돗개가 한 놈 있습니다. 어릴 때 누가 주어서 키우고 있는데 나는 그 놈을 완전하게 내 집 식구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 것입니다. 나를 따르고 내가 저를 지켜주고자 하듯이 그 놈도 내 집과 나를 지켜주려고 합니다.


부처의 감정을 자비라고 한다면 예수의 감정은 사랑이 될 것입니다. 굳이 표현하고 명명한다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일체중생을 향하여 일으키는 자비심이 바로 부처의 감정일 것이며, 모든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마음이 예수의 감정일 것이라고 억지 표현을 해본다는 것입니다.


셋째, 사회생활은 대중(군중)을 멀리할 수 없습니다.


사람을 사회적 동물이라고 한 참뜻은 혼자 떨어져 살 수 없기에 하는 말일 것입니다. ‘집에서는 부모를, 밖에서는 친구를 의지한다.’ 말이 있습니다. 연분이 있는 친구나 선배 후배를 알고 지내는 외에도, 사회에는 우리들과 연관 있는 사∙농∙공∙상의 많은 사람들과 종교 신앙적 믿음으로 관계된 인연들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생활하는 데는 많은 사람들의 보살핌을 의지해야 합니다. 대중을 떠나서 우리는 생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넷째, 사회생활은 몸을 버리고 해나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육근(六根 ; 眼. 耳. 鼻. 舌. 身. 意)으로 육진(六塵 ; 色. 聲. 香. 味. 觸. 法)의 즐거움을 추구하고 생명을 유지해 나간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대지도론에서도 말했듯이 세간적 생활과 출세간적 생활은 다릅니다.


세간적 생활이란, 눈은 속된 이것과 저것을 보려고 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들으려 하고, 코는 향기로운 향기를 맡고자 하며, 혀는 산해진미를 맛보려 하며, 몸은 편안한 곳을 탐합니다. 마음은 자기한테 이익되는 사람들만 가까이 하려 합니다. 이렇게 즐거움을 추구하는 방법을 몸의 뿌리를 위주(根身爲主)로 하는 생활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출세간의 생활은 이와는 다릅니다. 눈과 귀로서는 사사로이 보거니 듣지 아니하고, 맛을 탐하거나 몸의 쾌락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마음 속 풍부한 보물창고와 지혜의 샘을 열어 수없이 많은 것들을 채취하며 법락을 누리고 있습니다. 육신위주의 생활이 아니라 법신위주의 생활이라는 말입니다.


그러한 이상적인 세계가 있음을 알고 그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출가한 한국불교의 수행자들이 왜 거리에 나섰겠습니까?


이는 사사로이 보거나 사사로이 들은 것 때문이 아니며, 맛을 탐하거나 쾌락을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종교사회의 정의를 세우고 올바른 가치를 확립하기 위함이며, 왜곡되고 편향됨으로 해서 발생할 수 있는 삶의 고통과 질곡으로부터 우리의 이웃들을 구제하기 위함입니다.


따라서 이 일에서 비껴나 홀로 앉아 있는 수행자가 있다면 이는 진정 부처님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자신의 안일과 행복만을 추구하는 악지(惡知) 악각(惡覺)의 외도(外道)일 뿐입니다.


그리고 또 마땅히 출가위승이라면 입세간적 생활을 벗어날 수 없는 수많은 재가자들의 귀의처가 되는 교단을 지키고 발전시켜야 하는 동시에, 그들이 이 사회에서 받을 수 있는 차별과 그로 인한 아픔과 고통에도 앞장서서 바로 잡을 수 있는 용기와 결단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종교편향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라도, 종교관련 정부지원의 70%가 불교가 차지한다는 왜곡된 기사를 보고 사실 관계도 확인하지 않고 어느 정치 웹진에서는 메인 톱에다 수일이나 버젓이 걸어두고 있습니다.


종교관련 정부지원이라고 하는 말 자체가 왜곡이라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말을 한다면 문화재관련이라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문광부가 불교계에 지원하는 예산은 거의가 문화재 개∙보수와 관리에 따른 지원금입니다.


현재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문화재의 7~80%가 불교문화재라는 사실을 모르는 국민은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모든 예산은 합법적 절차를 따르고 있음입니다.


문제를 지적하고자 한다면 오히려 불교계가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국립공원 등을 드나들 때 내는 입장료 가운데 문화재 관람료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입장료의 40%~60%(지금도 그렇게 하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를 정부와 공동예치를 해 두었다가 불교계가 찾아 쓰는 것에 지나지 않는데도 마치 공짜로 주는 것처럼 생색은 정부가 다 내고 있으며, 이를 억지 논리로 세인의 눈과 귀를 이간시켜 분란을 조장하는 무리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 관계를 왜곡호도하면서 기사를 쓰거나, 또 그런 기사 쪼가리를 믿고 논객이 논점의 중심을 삼는다는 것이 이 얼마나 한심한 대한민국입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