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반야(般若,Prajna)란 하고 물었지.

碧 珍(日德 靑竹) 2008. 11. 30. 16:05

반야(般若,Prajna)란 하고 물었지.

 

 


새벽녘이 되니 열린 창을 통하여 시원한 바람이 들어와

무더웠던 지난밤을 잊게 한다,

요즈음은 한 밤이면 으래 깊은 생각이 꼬리를 물고 물리는 밤이 되어만 간다.


조석(朝夕)으로 독송하는 반야심경에서“般若”라는 말이 늘 마음에 와 닿아 새겨보든 중,

반야에 관하여 필아가 물었을 때가 생각나,

나름대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적으니 읽고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우리가 하는 기도는 스스로 마음이 순수해지는,

자기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바람. 염원 입니다,

즉, 기도는 자신의 삶을 넉넉하게 하는 정성의 길이요, 마음에 福樂을 가져오는

부처님과 자신이 만나 하나 되는 인연(因緣)이며 合一의 길 입니다.


개천물이 흐르지 않고 고였을 때는 썩기 시작하지만

계속 흘러간다면 모여 강물이 되고. 강물이 흘러 바다에 이르게 되듯이,

날마다 정좌하고 앉아 한마음이 되어 기도정진 할 때

부처와 나는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떨어지는 물방울 하나하나가 돌을 뚫듯이

날마다 기도하는 마음은 모든 우주를 변화시키는 생명의 원천적 에너지가 되며,

부처님의 말씀에도“철저하고 의심 없는 믿음이 있을 때,

그 믿음은 모든 것을 성취시키는 어머니가 된다.”고 하셨다.         


기도는 한마음 다하여 부처님께 귀의하고, 감사하는 합장의 마음이며,

외부로는 일체 중생들의 복락(福樂)을 기원하는

회향이 될 때 올바른 기도가 성취되는 것이다.

 

날마다 반야심경 270자를 독송하면서도

무엇인가 꼬집어 표현하기가 잘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반야(般若,Prajna)”라는 말입니다.


반야는 불교의 근본교리 중의 하나로 범어로는 프라자나(Prajna)이며,

인간의 진실한 생명을 깨달았을 때, 나타나는 근원적인 예지(叡智)를 말한다,

다르게는 무분별지(無分別智)라고도 하며,

이것은 우리가 보통 말하는 판단능력으로서 분별지(分別智)와 구별하기 위하여

반야라는 음역을 그대로 사용 한 것이다.


“반야”의 뜻은‘지혜 혹은 슬기’라고 말하지만,

지혜가 무엇인가 하고 물으면 또한 자신 있게 답하기 쉽지 않는 것이다.

즉, 지혜는‘어리석음이 없는 밝은 마음’이라 합니다.

 

우리가 지니고 있는 천태만별의 지식. 학식. 상식 등은

외부로부터 받아들여 알게 되는 것이지만,

참 지혜인 반야는 우리의 내적인 것으로 중생심. 무명심이 사라지고

그 뒤에 나타나는 마음. 광명을 말하는 것 입니다.


필아 그러면,“반야의 지혜”를 쉽게 이해하게 풀이 하여보자,


중국 양나라 무제 시절에 아무 죄 없이 황제의 말 한마디가 잘못 전해져서

형장에서 사라진 합두(合頭)스님이,


 “ 四大가 본래 空 이요

    五蘊이 본래 내가 아닐세.

    머리를 들어 봄바람에 나가니

    칼로 봄바람을 베는 것 같도다.”


라고, 남기신 게송을 음미해보면 이해가 잘 되리라 생각한다.


남을 원망하거나, 죽음에 대한 공포나, 생에 대한 애착하는 마음 없이 형장으로 묵묵히 간,

스님의 생사를 뛰어 넘는 경지, 나를 떠난 無我의 경지를

우리는‘반야의 지혜’라고 이해하고 생각하고 싶다.


지혜에 관하여 여러 설이 있으나 대체로,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는, 부처님 말씀 가운데 감추어 저 있는 진리이며, 관조반야를 통하여 체득되는 궁극,

즉 반야정(般若定)을 소중하게 여기며 사물의 근본실체를 바라보는

안목, 말 이전의 경지를 말하는 실상반야(實相般若)이고,


둘째는, 經.律.論.글자나 말에 의하여 진리를 알아내고,

이 진리에 의하여 수행하는 것을 말하며,

즉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자신이 가고 오는 당처를 돌아 볼 수 있는 내적인 작용,

깨여있는 생활을 말하는 관조반야(觀照般若)이며,


셋째는, 부처님이 설하여 문자화 된 經律論등 전부를 통칭한 것으로

문자가 반야를 나타내는 방편은 될 수 있을지라도 반야자체가 돨 수 없고, 

문자로 인하여 반야의 뜻을 전할 수 있는 것은,

즉, 우리가 문자로 볼 수 있는 270자 반야심경처럼

문자를 사용하여 읽고 쓰고 문자를 풀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공부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文字般若 또는 方便般若라 한다.       


필아, 이렇게 구별하여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셋으로 나눠서 이해하지만 실제는 實相般若만 있을 뿐이다.


이것은 빗물이 도랑. 개울. 강을 따라 바다에서 만나 그 모든 것,

이름. 형태. 모습이 없어진 상태와 같이

팔만사천법문. 팔정도. 육바라밀. 염불. 기도. 독경. 참선 등

이 모두가 실상반야를 이루기 위한 형태, 즉 하나의 방편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체험과 실천을 통하여 주체적으로, 대상적으로 보기 보다는

선정(禪定)의 체험을 통하여 자각되는 것인,

즉, 법이 있는 그대로 체득하는 자각(반야)통하여

아침저녁으로 수행할 때 마다 반야심경을 독송하고,

그 뜻을 깊이 관하고 살아간다면 날마다 실상반야 속에서 걸림없는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實狀般若는 우리에게 귀중한 것 중에 귀중한 것이다.


반야의 지혜에 대한 구체적 내용은 空으로 파악되었으며,

결국 空의 상태에 이룰 있는 중생은

자연히 반야의 지혜를 체득할 수 있다는 사상이 현재까지 일관되게 전개되는 것은,

즉, 결국은 佛敎의 目的은 般若의 完成으로 歸結하기 때문이다.


  “ 가사자락 걸치고 숲속을 마주하니

     오고가는 인연이 서로가 같지 않네,

     머리털은 오늘따라       

     회긋회긋 늙어가고

     아리땁고 어여쁨도

     이슬따라 사라지고

     저녁바람 불어오면 고운향기 흩어질걸

     하필이면 잎이 다진 그때가 되어야만

     모든 것이 덧없이

     허무한줄 알겠는가? ”


라고, 법안종 개조(開祖)이신 法 眼스님의 게송(偈頌)을 독송하면서

참 반야, 즉 실상반야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는 이 밤은 유난히 하늘도 높고

별이 밝으며 시원한 새벽바람과 더불어 필아가 닥아 오는가 보다.

                                                                 碧   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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