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

인생은 의기를 느끼는 것.

碧 珍(日德 靑竹) 2008. 11. 30. 16:41

    인생은 의기를 느끼는 것.

       

       

       季布無二諾 (계포는 두 번 약속을 하지 않고)

       侯瀛重一言 (후영의 한 마디 말은 무거웠네.)

       人生感意氣 (인생은 의기를 느끼는 것)

       功名誰復論 (공명을 논해서 무엇 하리?)


       위시는 중국 당나라 때의 명신 위징(魏徵)의‘술회(述懷)’라는 시의 끝부분이다.


       일개 산동의 나무꾼을 발탁하여 일약 대임을 맡겨준데 대한 군주의 도량에 감격해 하는 정이 구구절절 묻어있다. 훗날 당시선(唐詩選)을 엮을 때 편자(編者)가 그 첫 번째에 올려놓은 것만 봐도 모든 시와 문장은 의기를 느끼게 하는 것이라는 목적이 확연히 드러난다.


       우리나라 옛말의「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안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한다.」는 것이 아직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행동동기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며.


       머슬로우(Maslow)박사의 5단계 욕구 중 네 번째인‘인정받고 싶고, 존경받고 싶은 욕구’도 인간의 의사결정구조를 설득력 있게 들여다본 명분석이다.


       사람이 의기를 느끼는 것은 속내가 간파당하고 의중이 포착되었다는 것이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나를 국사(國士)나 칙사(勅使) 대접하듯 하며, 고향에서 박대 받던 나를 국빈이나  VIP처럼 대우하니‘기쁨이 극하면 슬픈 것인가 !’그렇게 감격하는 것이다.


       우리가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선수를 기리고 음악 콩쿠르나 국전에서 입상하고 신춘문예에 당선된 사람들을 축하해 주는 것도 감의기(感意氣)를 뒤집어서 본 것의 다름 아니다. 자연계에서 가장 강한 힘이 세월이라면 인간계에서는 가장 강한 힘은 감동 감화일 것이다.


       감동은 태산을 움직일 수도 있고, 미물(微物)의 마음을 울릴 수도 있다. 이 감동은 사람의 정신세계를 사랑하는 것에서 생기는 것이고 그 사람의 형이상학과 나의 형이상학이 일치하는데서 비롯된다.


       그 사람의 절대정신과 나의 절대정신이 조우하여 감응하는 것이니  비상하지 않을 수 없고, 범상해서는 아니 되는 것이다. 의기를 느끼게 하는 것은 인간을 이해하고 사람을 아끼며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는 뜨거운 휴머니즘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나 가능하다. 사람을 수단이나 방법으로 아는 사람은 성정 상 그럴 수 없다. 역시 이것도 온후한 사람들의 몫인 것이다.


       인생감의기는 나라와 사람사이에서 개재되기도 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존재하기도 한다.


       전자로 백제 마지막을 맞아 낙화암에서 꽃잎처럼 흩뿌려진 삼천궁녀가 그것이며, 고려에 올인한 두문동(杜門洞)의 72현(賢)이 그것이다.  그것은 조선에서 사육신(死六臣)과 생육신(生六臣)을 낳고 삼학사(三學士)로 이어지며 매천(梅泉)에서 솟구치고 충정공(忠正公) 민영환이 있게 되는 것이다.


       중국 남송(南宋) 때의 악비(岳飛)나 문천상(文天祥)은 나라는 달라도 청사(靑史)에 남을 이름들이다.


       후자로는 오왕(吳王) 합려(閤閭)가 오자서(伍子胥)를 쓰며, 유방(劉邦)이 한신(韓信)을 쓰고, 태자 단(丹)이 형가(荊軻)를 알아주고, 백락(佰樂)과 천리마(千里馬)의 사이, 박열(朴烈)열사와 가네꼬 후미꼬(金子文子)의 사이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것이다.


       의기(意氣)는 대저 바름과 큼을 좋아하니‘군자가 군자를 알아보는’것과 같이 지평이 넓고, 마음이 활달한 사람만이 큰 생각을 하고 큰 사람을 알아보는 것이다.


       지금은 백락이나 당태종 같은 사람이 없기 때문에 행운이 있어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죽은 사람이 살아온 듯 반가울 것이며 오매불망으로 그리워한 사람을 만난 듯 기쁠 것이다. 공자의「벗이 멀리에서 찾아오니 반갑지 아니 한가?」도 이 사람일 것이며, 소파(小波)가 필명을 몽중인(夢中人으로 쓴 것도 아마 이 사람을 그렸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이 의기를 느끼게 됨은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인정하고 장점을 북돋으며 나와 동격으로  여기고 같은 반열로 놓는 것이기 때문에 괴력(怪力)이 나올 수 있고 기사이적(奇事異蹟)이 나타날 수 있으며, 동지나 도반(道伴)으로 여기는 것이기 때문에 풀을 묶어 은혜를 갚고, 백골이 되어도 은혜를 잊지 못하며 견마지로(犬馬之勞)란 말들이 그냥 빈말로 전해지지 않았음이 증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인생감의기는 고향보다는 타지에서 더 느끼며, 동향인보다는 이방인들에게 더 강하게 나타난다. 그것은 이것이 의외성이라는 극적요소를 띠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가면을 벗어버리고 치부를 드러내 아무것도 더 감출 수 없는 상태에서 성품과 성품이 만나기 때문에 거짓이 끼어들 틈이 없다. 그것은 사람을 알아주지 않으면 이무기는 용이 못되고 봉황은 장끼나 까투리 취급을 받으며 천리마는 둔마로 전락하는 것이니 감의기(感意氣)의 피주체는 일탈된 것을 바로 잡으면서 현자(賢者)를 등용하며 재사(才士)를 적소에 앉혀서 치국(治國)이나 경국(經國), 구국(救國)에 기여하는 성스러운 행위의 담당자인 것이다.


       그것은 칭찬이나 격려, 포상이나 표창과는 다르니 이것들은 일시적 단편적 효과가 있으나, 알아줌은 평생에 한두 번 일어나는 대사건(大事件)이기 때문에 목숨까지 내놓는 것이다. 우리가 지기(知己)라고 친구를 일컬음은 나로 하여금 의기를 느끼게 하는 사람이란 뜻인 것이다.


       감의기는 전쟁이나 기업경영에서 용병술(用兵術)이나 용인술로서도 기능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이 가장 취약하고 가장 민감하다는 것을 알아채어 이를 활용하는 것이고, 이것은 사람은‘생각하는 갈대’란 지적의 바로 상위단계로서 사람의 정신을 이루는 지(知) 정(情) 의(意)가 서로 결합하여 뿜어내는 순백(純白)의 감개(感慨)인 것이다.


       사람이 감의기 하는 것은 끝까지 선의를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며, 약속이나 맹세는 없었어도 무언의 충정(衷情)을 알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의기를 느끼게 하는 사람과는 심야(深夜)의 정담(情談)을 하여도 피곤하지 않고 노변(爐邊)의 정담을 하면 정분(情分)은 더욱 돋아나는 것이다. 노천명의‘여왕보다도 더 행복하겠소.’의 그 사람이며. 청마(靑馬)의‘사랑하였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의 정운(丁芸) 이영도이고 조지훈의 「눈감고 거문고 줄 골라보는 밤에 흰 손을 흔드는」 사람인 것이다.


       또 논개(論介)가 촉석루에서 몸을 던진 것은 교과서적인 나라사랑이 아니라 최경회(崔慶會)나 황진(黃進)에 대한 감의기의 보답으로 보아야만,‘거룩한 분노는 죽음보다도 깊고 불붙은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는 것이 이해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우리가 단지 남녀 간의 사랑정도로만 알았던


       항우(項羽)와 우미인(虞美人), 허균(許均)과 매창(梅窓), 최경창(崔慶昌)과 홍랑(洪娘)은 실은 인생감의기에 너무나 투철하였고 철저하였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인생감의기는 이렇게 오는 것이다.


       장군 오기(吳起)가 부하의 상처에서 자기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는 정성이며. 관중(管仲)이‘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鮑叔牙)이다.’의 그 말이며. 좌절될 것을 알면서도 유비의 삼고초려(三顧草廬)에 움직인 제갈공명의 수심(愁心)이며, 자기의 노래를 알아주던 종자기(鐘子期)가 죽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백아(伯牙)의 곡조였고 소금수레를 끌던 천리마를 알아보고 자기의 웃옷을 벗어 등을 덮어준 백락의 포용성이다.


       오늘날 지적이고 이지적인 것만이 전부라고 알고 있는 사람들은 감의기를 느끼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남의 일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옛날 우리 조상들의 존재방식이었으며. 서양의 철학과 논증방법으로는 알 수 없는 동양적 정서이자 동양적 가치인 것이다.


       이것은 공명(功名)을 따져서 무엇 하겠는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이기적인 내가 이타적인 나로 바뀌는 - 인간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정신의 위대한 활동인 것이다.


       지금은 옛사람들의 기개를 닮을 수 없고 옛사람들이 느꼈던 감동도 맛볼 수 없지만 임제(林悌)가 황진이 무덤에 분향했듯이, 만당(晩唐)의 시인 두목(杜牧)이 오강정(烏江亭)에서 항우를 추모 했듯이 나 혼자만이라도 이를 기억하며 그 감동을 간직하는 것이, 후대인으로서의 자세이자 의무라고 생각한다.   文 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