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걸리(濁酒) 예찬.
어느 일간지는 막걸리(濁酒)에 대하여 주류업계 사람들은 30년 만에 찾아온 호황이란 표현까지 쓰고 있다고 보도 하였으며, 막걸리 호황은 수치로 나타나는 것으로 지난달까지의 막걸리 매출액이 작년 같은 기간보다 25% 가까이 늘어났고, 전체 주류 매출 신장률이 5.4%인데 비하면 5배 정도 높은 수치이다, 또한 어제 어느 일간지에도 막걸리(濁酒)가 이렇게 잘 팔리는 건 1970년대 이후 처음인 것 같다고 보도 되었는데, 그래서 불황인 요즘 막걸리 회사 직원들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환하고, 경기침체가 뚜렷하여진 지난 9월 이후부터 대포집이나 서민 식당에서는 이외로 막걸리가 잘 팔리는 분위기 이며 나도 자주 막걸리를 마신다. 그런데 막걸리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이유는 well-being trend 와 가격과 맛이 조화를 이루었기 때문이며, 막걸리 가격은 1되에 2.000원대로 아주 헐하고 손쉽게 배를 채우고 주도가 6도로 취할 수도 있기 때문이고, 막걸리는 100% 우리 쌀로 만들어 영양이 풍부하고 주도도 6%로 적당하며. 주정(알코올)에 물과 향료를 섞어서 희석식 방법으로 만드는 소주보다 맛이 부드러우면서 아미노산과 유산균이 풍부한 well-being 술이기 때문이다. 지난봄에 大邱에는 막걸리 파동이 일어났다, 살아 가다보니 별난 일중 일이다, 대구에서 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알아주는 大邱의‘팔공막걸리’는 회사 종업원들의 파업으로 시중에서 한때 사라진 때도 있어 달포가 넘어 마시지 못한 때도 있었다. 서민의 술인 막걸리를 즐기는 사람으로 매우 섭섭한 마음이었고 원망 아닌 원망스러웠었다. 막걸리는 옛날부터 서민들이 즐겨 먹는 술이기에 서민주(庶民酒).농주(農酒)로 오랜 세월동안 우리민족과 더불어 온 술로 서민의 애환(哀歡)과 동반자 역할을 하여왔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주는 청주(淸酒).소주(燒酒).탁주(濁酒.막걸리)이다, 소주는 밑 물을 증류시켜 이슬을 받아낸 것이고, 청주는 밑술에 용수를 넣어 맑은 술이 고이면 퍼내는 것이다.*(현재 대부분 소주는 희석식이다) 맑은 술인 청주를 약주(藥酒)라 하는 까닭은 옛날에는 쌀농사가 어렵고 수확이 적어 쌀이 부족할 때가 많아, 귀족이나 사대부들이 지배하던 시절 하에서는 백성에게 금주령을 내리면서 자기들만은 계속 술을 마시기 위하여 보약으로 마신다고 연유한데서 나온 이름이다. 그러나 조선태종 재위15년(1415)에 금주령을 내렸지만 백성들이 즐기는 막걸리(濁酒)는 금지 시키지 않았고, 영조 재위32년(1756)에 제사에도 예주(醴酒.식혜)만 쓰라는 강력한 금주령을 내렸지만 막걸리는 제외 했다는 기록이 전해 오고 있다. 그런데 세종실록(8년4월14일)에 태종의 딸인 숙근옹주가 남편 화천군 權恭의집에서 막걸리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으며, 성종대왕도 막걸리를 즐겨 먹었으며 자주 신하들에게 막걸리를 하사 하였다 한다. 이처럼 막걸리에 관하여는 관대했던 이유는 農酒, 즉 일할 때 먹는 勞動酒이며 서민인 백성의 술이기 때문이다. 國民酒인 막걸리는 여러 이름으로 불리어 왔다, 고려의 李규보는 나그네 창자는 박주로 씻는다는 시에서 표현으로 박주(薄酒). 배꽃 필 때 누룩을 만들기에 梨花酒라 하고. 白酒. 회주(灰酒). 혼돈주(混沌酒)라고 각 지역에 따라 불리어 왔으며, 광해군 때, 제주에서는 유배 온 인목대비의 어머니 노(盧)씨가 술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팔아 생계를 연명했다하여 모주(母酒)라고도 불렀다. 보편적으로 옛날이나 지금도 일반서민 노동자 등 저소득층이 많이 애주(愛酒)하였기에 國民酒. 서민주. 농민주. 노동주 등으로 불리나, 막걸리는 서민들만의 술은 아닌 가 본다, 1950년대에는 보릿고개란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도시서민. 농민들의 살기 어려움을 지금 젊은 세대는 이해하기가 힘 든다, 8.15해방으로부터 1970년도 중반까지만 해도 많은 국민들이 배고픔을 견디기에 어려웠던 시절로 하루에 세끼 밥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었을까. 그래서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산나물. 소나무 껍질에다 좁쌀이나 보리 몇 줌을 넣고 끄려 먹기가 일쑤였고. 사료용인 딩겨로 개떡을 만들어 도시락대용으로 가져오는 급우들이 많았었다. 더욱이 양조장(술도가)이나 잘사는 집에서 담은 밀주인 농주를 거르고 나오는 술지게미를 얻어다, 허기진 배를 채우다 보니 어른들은 그래도 지낼 수 있으나 아이들은 배고픔은 면하나 술지게미 덕분에 술이 취하여 오리걸음으로 등교하는 애들도 있었고, 동네 따스한 담 밑에 술이 취하여 자는 모습을 그 당시 자주 볼 수 있는 것 또한 가난이 가져온 happening 이었다. 현재도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막걸리 인기가 치솟았다, 전국적인 막걸리 체인점도 생겨났고, 우리지역에도 합동으로 술을 생산하는 팔공막걸리 등 회사가 꽤나 많이 생겨났으며, 시내와 동네를 다니다 보면‘왕대포 한잔. 조기 한 마리 1.000원’이라 쓴 입간판과 현수막을 많이 볼 수 있는데, 아마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는 막걸리집이 많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대구 막걸리의 맛이 좋아서 그런지 유명한 막걸리집이 많이 기억난다, 1960년 중반 대학졸업 후 부터 다니기 시작한 유명한 막걸리 집으로, 시청 뒤 막걸리 한주전자에 오징어나 잡어 회 한 접시에 650원으로 인기 대단하여 문전성시를 이루었던 둥굴관. 대성관, 동문동에 꽁치꾸이로 유명한 녹향시당, 봉산동 중앙파출소 뒤 일대 막걸리 집, 향촌동 등은 당시 서민. 학생 등 경제력이 약한 사람들에게는 인생을 논하고 울분을 풀어 애환을 달래던 안식처들 이었다. 1970년 중반부터 경제력 성장으로 생맥주집이 생기면서 맥주 값이 크게 비싼 편이 아니라 맥주집이 성하게 되면서, 막걸리 집들의 경기가 하향곡선으로 접어들었다가, 2~3년 전부터 경제상황이 사상 최대의 경기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또다시 막걸리집도 확산추세로 제2의 막걸리 전성시대가 열리고 있는 실정이며 서민들의 발 거름이 잦아지고 있다. 사람마다 술을 즐기는 모양세가 다 다르다, 그래서 즐겨 혼자서 술을 마시려 다닌다, 친구들과 여럿이 마시는 것도 좋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마음 놓고 편히 할 수 있고 술맛도 음미할 수 있어, 혼자서 술을 마시러 갈 때가 좋고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을 참 좋아한다. 그래서 40대부터 정확하게 27여년을 다니는 무림주막(茂林酒幕)이라는 대포집이 종로 뒷길에 있다, 주모인 별이 할매는 이제 팔순이 다 되는 老할매로 자식. 손자를 잘 둔 다복한 가정의 할머니로 음식솜씨 하나 좋고, 마음씨 넓고 부드러운 사람으로 종로일대에서 소문 난 할머님으로 이집에는 들락날락하는 애주가들의 면면을 보면, 대학총장부터 구두 닦는 이들까지 오는 다양한 계층의 애주가들이 모이는 집으로, 어느 애주가 한분이 오랜 세월을 출입하는 사람들의 스냅사진을 찍어 간이 앨범도 만들어 놓은, 늘 웃음꽃 피는 집이나 세월 따라 옛날 모습과 다르게 변하고 있다. 술은 인생에서 뺄 수 없는 기호음식으로 좋은 것은 확실한데, 술은 먹는 사람에 따라 양약으로 좋기도 하고 독약으로 나쁘기도 하니 결과적으로 먹는 사람이 문제인 것이다. 여하간 하루 일을 마치고 귀가할 때, 막걸리한잔은 마음과 몸의 피로를 풀어 주는 영약이 아닌가 하며, 朴木月님 詩한수를 생각한다.
“ 강나루 건너서 밀 밭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 백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이 詩는 朴木月님이 1964년 4월‘상아탑 5호’에 발표한 시로, 趙之薰님의‘완화삼(玩花衫)’에 화답한 작품으로 유명한 시이다. 碧 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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