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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영화‘연평해전’이 국민에게 주는 참 뜻은 무엇인가.

碧 珍(日德 靑竹) 2015. 6. 4. 23:26

영화‘연평해전’이 국민에게 주는 참 뜻은 무엇인가. 

 

 

 

 

연평해전(延坪海戰)은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에 서해 연평도 부근 해상인 북방한계선(NLL) 남쪽의 연평도 인근에서 2차례에 걸쳐 대한민국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간에 발생한 해상 전투이다, 즉 연평해전(延坪海戰)은 1999년 6월 15일 일어난 해전을1차 연평해전이라 하며, 2002년 6월 29일에 일어난 해전은제2 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이라 한다.

 

즉 2002년 6월 29일 서해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NLL)부근 해상에서 南北韓 경비정간의 군사적 충돌로 일어난 해전으로서해교전이라 불리어 오다가, 정부는 2008년 4월서해교전으로 불리던 이 전투를 승전 의미를 담은제2 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으로 명명하고 추모행사도 국가보훈처 주관 하에 정부기념행사처인 국가보훈처로 승격시켜 옮겼었다.

 

제2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이날 북한 경비정이 NLL을 무단 침범하면서 기습 공격하여 오자 이에 맞서 30여분 교전 끝에 격퇴시킨 실전 과정을, 金학순 감독이 만든연평해전영화에서 해군 고속정인 참수리 357호 승조원들이 조국 사수 전투정신을 생생하게 재현하므로, 당시 NLL을 사수한 우리 해군용사들의 숭고한 호국혼(護國魂)이 영화를 빌어서 부활하였다,

 

이 영화연평해전은 무려 13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날의 숨 가쁜 순간들이 스크린에 흘러넘치도록 그린 제2 연평해전 영화로, 7년 작업 끝에 오는 6월 10일 개봉을 앞두고 전사 장병 유족들 앞에서 첫 시사회로 지난 6월 1일 공개하였는데, 영화연평해전’속에서 피를 쏟으면서도난 배를 살릴 테니, 넌 가서 사람들을 살려라고 외치는 병사의 모습 등으로 이날 관객들은 숙연하게 관람하였다고 한다.

 

문제는 이연평해전영화는 윤영하 소령, 한상국. 조천형. 황도현. 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 전사, 19명 부상의 희생 속에 북한군을 퇴각시킨 승전인데도 불구하고, 당시 金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으로 대북 경각심이 흐트러진 데다 월드컵 4강 진출로 들뜬 분위기까지 겹쳐잊힌 전투가 되도록 한 당시 올바르지 못한 정부와 일부 정치인들의 행태를, 이 영화는 새삼 되돌아보고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는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겠으며. 더불어 인터넷 모금과 해군 바자회 등 제작을 뒷받침한 民.軍의 정성 역시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있다.

 

특히 유가족 중 어떤 한 순국용사의 아내는 예고편을 보다 밖으로 뛰쳐나갔고, 어떤 아내는 딸과 함께 극장에 들어왔지만 영화 속 교전이 시작도 되기 전에 자리를 Em기도 하였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손수건으로 눈가를 닦는 유족도 있었으며, 막상 극장까지는 왔지만 차라리 눈을 감아버리는 유족이 많았다고 하며, 또 한 어머니는‘아들 시신을 찾는 장면에서 엉엉 울었다. 고맙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다’고 하였었다, 특히 이 영화 제작에 자금이 부족하여 촬영이 여러 차례 끊겼었으며, 결국 제작비 60억 원 중 일부는 후원자 7000명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하였으며, 숭고한 뜻으로 값을 매기자면 어느 영화보다 비싼 값의 영화이기에 이 영화연평해전에는 당사자 아니면 짐작조차 하기 힘든 고통이 아직도 가득하다.

 

되돌아보면 2002년 6월 29일 연평도 근해 북방한계선 부근 해상에서 일어난 제2 연평해전(第二延坪海戰)은, 제1 연평해전으로부터 3년 후인 2002년 6월 29일은 韓日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기였는데, 즉 2002년 한일 월드컵 기간 중 일어난 이 사건으로 대한민국 내에서는 국경 침범의 대응 방식에 대한 반성과 논란이 일었으며, 2004년 교전수칙을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문제의‘변경된 교전수칙’이란, 2002년 제2연평해전 때에 우리 해군은 소위 金大中 대통령이 지시한 것으로 알려진 괴상망칙한 DJ 교전규칙을 적용받고 있었는데, 그 내용 또한 1.북방한계선(NLL)을 지켜라. 2.우리가 먼저 발사하지 말라. 3. 상대가 발사하면 교전규칙에 따라 격퇴하라. 4.전쟁으로 확대시키지 말라는 것이 교전규칙이다, 다시 말하며 적이 먼저 쏘거든 맞고 죽어라 는 말과 무엇이 다른 가 김대중에게 다시 한 번 묻고 싶다.

 

즉 제2 연평해전 당시 이에 대응하는 우리군의 교전 원칙이‘적이 쏘거든 응사하라’였던 것이니, 이거야야말로 생각 있는 인간이라면 나.너 구별 없이 누구나 웃을 전투지침으로 장병들의 손발을 묶어 놓은 채 적의 포격 앞으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제2연평해전의 결과는 예정된 것이라 보기보다 이미 확정된 것으로, 순직한 6명의 장병들은 金大中과 그의 추종 좌파세력과 좌파정부가 죽인거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제2차 연평해전에서 우리 장병 6명이 사망하고, 19명이 부상당하였으며 고속정 1척이 침몰하였으나, 金대중 전 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본으로 출국을 하여 日本 天皇과 함께 박수를 치고 웃으면서 즐겁게 월드컵을 관람을 하였기에민족의 반역자란 비난을 들었으며,‘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전쟁이 일어날까봐 무서워서 국민을 버리고 자신만 살겠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도망갔다는 비난이 일어난 일이 있는데, 문제는 당시 金대중 대통령은 6월 30일 2002년 FIFA 월드컵 결승전 경기를 관람하고, 7월 1일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가지러 6월 30일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였다고 보도 되었다.

 

아무턴 연평해전 당시 대통령과 정부나 일부 정치인들, 특히 좌파적인 정치인들과 사람들은 조국을 사수하려다 저들의 죽음을 슬퍼하는 데에는 인색하였었다. 즉 金大中과 좌파정부와 우리 국민은 유가족들의 새까맣게 타들어 간 가슴을 보듬어 주고 함께 슬픔을 나누는 데에는 주저하였고 그들의 눈치를 보았다. 또한 추도식은 해마다 늘 2함대사령관이 주관하였고, 정작 이들의 죽음을 책임져야 할 고위층들은 이 눈치 저 눈치 보면서 자리 피하고 회피하기에 전전긍긍하는데 급급하였던 것이 당시 상황이자 사실이다.

 

그후 정권교체로 인하여 새 정부가 들어서며 제1연평해전의 전승비를 세우고, 제2 해전에서 순직한 장병들의 흉상도 제작하였으나, 만시지탄(晩時之歎)이지만 그래도 다행스런 일이며, 역사는 반드시 반복된다고 하였는데 더욱이 서해 NLL은 지금도 북한이 시비를 걸고 있는 사안이기에 제3의 연평해전 가능성은 항상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두 번 다시 정치논리를 개입시켜 인재(人災)로 우리의 아버지. 형제를 더 잃어서는 안 되겠다, 또 제 2연평해전에서 순직한 장병들은 명실 공히 전쟁영웅으로 추앙되어야 하고, 유가족과 부상자들은 국가에서 책임지고 돌보아야 하겠고, 두 번 다시 불행하였던 제2 연평해전처럼 제3의 연평해전은 어떻게든 막아야 하겠다.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자, 지난 10여 년 동안 金대중-盧무현 左派정부가 北韓에 굴욕적으로 천문학적 돈을 조공으로 바치고 우리가 얻은 것이 무엇인가?, 從北 정권 10년 동안 대북특사를 무분별하게 툭하면 파견하였는데, 대북특사에 어마어마한 돈을 갖다 바치고 대화를 하여서 얻은 것으로 무엇이 있다는 것인가?. 즉 從北정권 10년 동안 7조 7350억 원의 돈을 북한에 조공으로 바치고 그 잘난 정상회담을 추진한 從北的 관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이는 亡國的이고 이적행위(利敵行爲)가 아닌가 한다.

 

 

 

 

출처 : 벽진산방
글쓴이 : 碧珍(日德. 靑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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