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 사상

병호시비(屛虎是非)와 左와 右의 의미.

碧 珍(日德 靑竹) 2009. 4. 11. 18:10

    병호시비(屛虎是非)와 左와 右의 의미.

     

                 虎溪書院과, 西厓 선생(上) 과 鶴峰선생(下)

     

    安東의 儒林사회에서 400년간 이어져 온 논란으로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과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의 위패를 왼쪽에 모실 것이냐, 아니면 오른쪽에 모실 것이냐의 문제를 두고. 양쪽 제자들 간에 벌어진 논쟁이 병호시비(屛虎是非)이다.

     

    조선조 儒敎思想에서는 左와 右의 문제, 즉 오른쪽보다는 왼쪽이 높은 자리로 여겨졌기 때문에, 양쪽 제자들    은  서로 자기의 선생을 왼쪽에 모시려고 애를 썼는데, 가운데에는 퇴계(退溪)가 모시고, 그 왼쪽에 학봉의 위패를 모시면 서애 쪽이 반발했고, 왼쪽에 西崖의 위패를 모시면 鶴峰 쪽이 반발하였는데, 옛날 사람들은 이를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들은 왜? 왼쪽을 오른쪽보다 위라고 생각하였을까. 그러기에 조선시대 좌우개념에 비추어 보면 右파보다는 左파가 더 높다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 아닌가?

     

    문제는 어느 책에도 左와 右의 문제를 시원하게 명확하게 설명하는 내용이 없는데, 마침 columnist 조용헌 박사가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대가들을 역방(歷訪)한 끝에 나름대로 결론을 내려서, 조선일보‘조용헌 살롱’에서 자세한 설명이 있기에 인용하여 보면,

                                                                                                         

    먼저 左 자에는 工이 들어가며, 右 자에는 口가 들어가는데, 工은 공부(工夫)의 의미가 있으므로 왼쪽 내지 왼손은 공부하는 기능을 담당한다고 하며, 반면에 口는 입 구(口)이므로 오른손은 입에 음식을 넣을 때, 즉 밥 먹을 때 사용하는 손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한다.

     

    이를 다시 우뇌(右腦)와 좌뇌(左腦) 이론에 대입하여 보면, 왼손은 우뇌와 연결되고 오른손은 좌뇌와 연결되기에, 왼손을 많이 쓰면 우뇌가 개발되고, 오른손을 많이 쓰면 좌뇌가 개발되므로 왼쪽이 공부기능이라고 한다면, 우뇌를 개발을 하면 우뇌는 창조력과 종합적 사고를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누가 退溪의 정통 계승자인가 다툼이 경북 安東에서 400년 동안 자존심 대결을 벌여 왔던 풍산 류(柳)씨와 의성 김(金)씨 가문의 병호시비(屛虎是非)가, 이번에 학봉 종손이 양보를 해서 400년 시비에 종지부를 찍었는 것은 좌우가 문제가 아니라 호계서원(虎溪書院)을 복원하고, 선비정신을 계승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 덕분으로 보아야 하겠다.

     

    西厓 柳成龍(1542~1607)과 鶴峰 金誠一(1538~1593)은 조선 선조 때 학자이자 정치가로,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수제자들인데, 두 분 다 경북 안동 출신으로 退溪는 鶴峰을 보고‘이런 아이는 일찍이 보지 못했다’고 하였으며, 또 西崖를 보고도‘하늘이 내린 아이’라고 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는데, 나이는 鶴峰이 4세 위였으며, 생전 관직은 西崖가 領議政을 지냈고 鶴峰은 慶尙道 觀察使로 西崖가 보다 높았다.

     

    그런데 문제는 西崖와 鶴峰은 살아 있을 때 나쁘지 않았던 두 사람의 관계는 광해군 12년인 1620년부터 이상하게 변하게 도었는데, 당시 퇴계(退溪)를 모신 안동의 여강서원(뒤에 虎溪書院)에서 두 사람의 위패를 함께 모시기로 하였는데, 退溪의 왼쪽인 상석에 누구를 앉히느냐를 두고 鶴峰 쪽은 나이순으로 西崖 쪽은 벼슬 순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므로 논란이 생긴 것인데, 당시 嶺南學派의 장로 정경세(鄭經世)는 西崖의 손을 들어주는 판정을 내렸다.

     

    이 문제는 순조 5년인 1805년에 또 다시 불거졌다. 즉 嶺南 儒林들이 서울 문묘에 西崖. 鶴峰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등 네 학자의 신주를 모시게 해 달라고 청원키로 하고, 자손 네명이 함께 상소문을 쓰던 중 나이순으로 쓰자는 합의가 이뤄졌으나 이에 불복한 西崖 측이 따로 상소를 올렸는데 조정에서는 둘 다 기각하여 버렸다.

     

    그러나 이어 3차전이 벌어졌다. 寒岡과 旅軒 쪽 선비들은 자기들끼리 상소를 올리기로 하고 이를 嶺南 儒林에 통보하자, 安東 儒林은 西崖. 鶴峰 사이의 다툼을 그만두는 동시에 寒岡. 旅軒파를 규탄해야겠다고 결심한 뒤 류회문(柳晦文)에게 그 통문을 쓰게 했는데, 이 통문에서‘鶴峰. 西崖’의 순으로 글을 썼던 것이 화근이 되어 돌이키기 어려운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때문에 西崖派는 호계서원(虎溪書院)에 등을 돌리고 병산서원(屛山書院)에 따로 모이므로 安東의 儒林들은 두 파로 갈라섰기 때문에, 두 서원의 앞글자를 따 이를‘병호시비(屛虎是非)’라 부르며, 최근 호계서원의 복원 추진 과정에서 西崖와 鶴峰의 후손들이 만나 벼슬 순서대로 하기로 합의한 것은 1620년의 결정을 따른 모양세가 되었다.

     

    생각하기에 1694년 숙종 20년에 폐비 민씨 仁顯王后 복위운동을 반대하던 南人이 화를 입어 실권(失權)하고 소론과 노론이 재집권하게 된 사건인 갑술환국으로 중앙 정계에서 실각하여 지방으로 물러났던 嶺南 南人은 屛파와 虎파로 갈라진 뒤 각자의 세력을 키우기 위하여 서원과 향교에서 조직적. 학술적 역량을 축적 하였으며, 이는 조선 후기 위정척사운동(衛政斥邪運動)과 의병. 독립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역사는 말하고 있기에, 병호시비를 단순히 양반 가문 사이의 무의미한 체면 싸움이었던 것으로 볼 수는 없는 것은, 조선 성리학을 대표하는 退溪의 학문적 정통을 계승하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선생 (1538~1593)은 본관은 의성(義城), 의성김씨 청계공파이며, 호는 학봉, 자는 사순(士純), 시호는 문충(文忠)으로 西厓 柳成龍과 더불어 退溪 李滉선생의 문인으로 정치적으로는 東人에 속했다.

     

    청계선생의 본명은 김진(金璡/1500~1580)으로서 부친 예범(禮範)씨와 모친 영해신씨의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슬하에 약봉(藥峰) 극일(克一). 귀봉(龜峰) 수일(守一), 운암(雲巖) 명일(明一). 학봉(鶴峰) 성일(誠一). 남악(南嶽) 복일(復一)을 두었으며, 극일, 성일, 복일이 대과에 수일, 명일은 소과에 합격하여 이 아들 다섯을 천전오룡(川前五龍), 김씨오룡(金氏五龍)이라 하였으며, 내앞 대종택을 오자등과댁(五子登科宅)으로 불렀는데 이들이 義城 金氏 청계공파이다.

     

    1592년 朝日전쟁(임진왜란) 발발 전에 그는 서인이었던 황윤길과 더불어 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일본의 침공가능성을 일축하는 발언을 하여 당시 조정의 오판을 초래하였고 후일 조일전쟁이 발발하자 죄를 받고 유배가던중 용서를 받고, 경상도 초유사로 제수되어 진주에 주둔하면서 관군을 지휘하고 군수지원, 관군과 의병간의 관계 조율, 민심안정 등 쉴 새 없이 분투하다가 결국 과로로 진주성 진중에서 순직하였다.

     

    그는 역사의 죄인이었는가? 그에게 두고두고 오점으로 남았을 사건이 7년에 걸친 朝日전쟁으로 그는 수많은 비난을 당대에는 물론 몇백년 동안 들어야했었다.

     

    朝日전쟁 발발 1년전, 그는 사신으로서 일본에 갔다. 당시 수상한 움직임을 보이던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기 위한 목적이었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은근한 협박에 굴하지 않고 주체적인 외교를 펼친 것은 평가할 만하나 문제는 귀국후 복명하는데 금명간에 일본의 침공이 예상된다던 黃윤길의 주장을 반박하며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떠했는가. 바로 1년 후 전쟁이 발발했으므로, 졸지에 그는 당파성에 치우쳐 잘못된 주장으로 대사를 그르친 인사가 되어버린 것이다.

     

    柳성룡의 징비록에 보면 그가 그런 발언을 한 것은 그가 전쟁가능성이 정말 없다고 본 것이 아니라, 사실 그렇다고 변명을 하고 있는데, 그러나 그가 정세판단을 그르쳤고 당시 조정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東人의 영향력 있는 인사였음에도, 시비를 공론화시키지 못했고 대비책을 마련하지 못해 조선 전토를 휩쓴 전란의 참화에 무방비위의 사실로 볼 때 그 책임을 l할 수는 없다고 보는게 대체적 시각이나, 그렇다고 朝日전쟁의 발발에 대한 모든 책임과 비난이 그의 몫이라면 과연 이게 온당한 일인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학자로 본관 풍산(豊山) 서애(西厓) 별칭 자 이현(而見), 시호 문충(文忠). 출생지 경북 의성으로 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4년(명종 19) 사마시를 거쳐, 1566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5년 직제학, 다음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가.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 이조판서를 겸하다가, 건저(建儲)문제로 서인 정철(鄭澈)의 처벌이 논의될 때 온건파인 남인에 속하여 강경파인 북인 이산해(李山海)와 대립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 이순신(李舜臣) ·권율(權慄) 등 명장을 등용하였다.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훈련도감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은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 ·병산서원(屛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西崖集. 징비록(懲毖錄) 등이 있고, 편서에 황화집(皇華集). 정충록(精忠錄) 등이 있다.

     (원문. everkorea.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