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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조위금(弔慰金)과 동창 모(某)야에 대한 斷想.

碧 珍(日德 靑竹) 2017. 6. 27. 21:40

 

 

조위금(弔慰金)과 동창 모(某)야에 대한 斷想.

 

 

(1).

세상 어느 나라이든 그 나라만이 갖는 사회관습과 도덕, 예의범절 그리고 각 종교의 믿음에 따라 각양각색 여러 법과 규율을 제정하거나 관습에 의한 법이 생성 존재한다, 우리주변에서 자주 일어나는 경조사(慶弔事), 즉 경사(慶事).상사(喪事)때 문제도 그러하나 이는 예의범절에 해당되는 관습적이며 도덕적인 규범일 뿐이다.

 

그러나 상부상조(相扶相助)의 미풍양속을 강조하는 우리네의 좋은 관습 이였던 이 제도가 요즘은 그 실질 내용이 많이 변질 되어 가고 있다고들 한다, 근래 들어 청첩장. 부고장 등 경조사에 대한 통지가 지나치게 남발되다보니 세간에서는세금고지서라는 악명으로 회자(膾炙)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는 것 또한 현실이다. 가까운 친지는 전혀 문제될 것 없다고 하지만,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사람들에게는 경조사 통지서 초청장을 주고받는 것이 조차 오히려 문제가 되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앞서 통지를 고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가 있다.

 

그러기에 경조사가 있을 때에 자주 대면하고 마주치는 사람들인데 누구는 초청을 하고 안 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경조사 통지를 결정을 하는 데는 감안하여야 될 여러 가지 사유가 있는데 그것을 자칫 소홀히 하였다가는 결례를 범하고 인심을 잃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경조사 통지를 하였던 아니하였던 간에 축하나 조의(弔意)를 하여주어야 하는 것인지 말아야 하는 것인가를 정하는 것도 초청자만큼이나 어려워 초청자나 피초청자나 입장이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부조금(扶助金)이란 남이 치르는 혼사, 장례식 따위의 경조사를 돕기 위하여 주는 축의금(祝儀金)이나 부의금(賻儀金.賻儀錢, 弔慰金, 弔意金) 등 금전에 이르는 말로 경조사 부조금이나 위로금이 이에 속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상부상조하는 미풍량속이 자리를 잡게 된 것은 이조 중종 때 최초로 염전향약(鹽田鄕約. 呂氏鄕約)의 실행 때문이라 하겠다.

 

얼마 전 친상(親喪)을 치루고 난 어느 지인이 조문객에 대하여 자기 나름대로는 그럴만한 관계가 아닌데 하며, 상사(喪事)에 오지 않았다니, 조의금(弔意金)이 적다는 우회적인 말과 싹 입을 닦아 인간성이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며 언짢아하는 말을 우연하게 듣고 보니, 아무턴 축하나 조의(弔意)를 표하였다면 넘어 갈 일인데도 굿이 상대방을 간접적으로 거론하기에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까지 서운하다는 것이 안타까웠는데 제삼자로서 무엇보다도 慶事의 기쁨과 喪事의 슬픔을 반감시키는 그런 것이 유감스럽다는 생각이 들었으며, 그간 다른 사람의 경조사에 대한 자기 자신이 행하여 온 행태를 다시 한 번 되새겨보아야 하겠다.

 

 

 

(2).

어느 친상(親喪)을 치루고 난 지인(知人)이 조문객에 대한 말을 우연하게 듣다보니, 지난날 母親喪事에서 있었던 일이 떠올라 생각을 거듭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후 얼마나 그를 예의범절에서나 인간적. 도덕적으로나 문제가 있다며 언짢아하였겠는가 생각하니 응어리가 치밀어 오른다. 

 

당시 치매(癡呆)로 고생하시는 어머님과 맏이인 그와 6년 7개월여 둘만이 함께 계시다가, 공직생활을 하는 막내아우가 잠시나만 모시겠다하여 경기도 광주에 가 계시다 돌아가셨다. 어머님께서 막내 집으로 가시기 전 한평생 사셨던 고향 星州 山川과 동네와 옛집을 보고 싶다기에 다녀온 후 막내아우 집으로 가셨다.

 

人命은 在天인가 보다, 운명하시던 날 그날따라 어머님이 보고 싶기에 평소 하던 것처럼 아침 5시반경 동대구역를 출발하여 10시경 어머님을 뵙고 다시 대구공항에 도착하니, 막내아우가 다급한 목소리로 어머님이 이상타하여 되돌아 비행기로 올라가 어머님을 뵈오니 용안(容顔) 너무나 밝아 어아 해 하고 있는데 그의 손을 잡고 몇 마디 당부하시고 그대로 운명(殞命)하시어, 경기도에서 빈소를 차리고 집안 예(禮)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한 후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능평리 時安공원 묘역에 영면(永眠)하신다.

 

대구에서 오래 살아온 그가 어머님 상사(喪事) 때 경기도에서 장례를 치르다보니, 대구에 있는 동창. 친구와 지인들이 부득불 문상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대구에서 새삼스레 조의를 표하는 일들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근래에 그를 고민하게 하는 사안의 단초(端初)가 이때 일어났다,

 

사단(事端)의 실마리는 母親喪을 치루고 下邱 후 몇 날 뒤 모(某)란 친구가 아늑한 야산과 주택으로 둘러싸인 수성구민운동장 옆 가장자리로 나오라고 하여 가니, 의외로 20여명 고교동창과 모 신앙모임 회원이 모여 있고 회식준비가 되어 있어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모임을 주도한 모(某)야가 하는 말인즉 지난 母親喪事 때 문상(問喪)을 하지 못하여 미안하여 마련하였다고 하기에 그래도 동창은 동창이구나 하였었다, 그런데 다들 즐거이 마치고 헤어지면서 현금 16여만 원을 주면서 조의금으로 거두어 음식을 장만하고 남은 돈이라며 주기에 받지 않으려 몇 번 사양하였으나 주위의 눈 때문에 받고 아무턴 고맙다고 할 수 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뒤에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그 당시 母親喪 위로한다며 모임주도한 모(某)야가 누구에게 얼마를 받았다고 기록한 조문(弔問)자 명단과, 얼마를 어떻게 사용하였다는 명세서를 주지 않았기에, 그 후 회식에 참가한 동창들의 길.흉사(吉凶事)가 생길 때마다 가야하나마나 등으로 고민스러워진 일이 연속이었다. 지금도 조의금이 얼마가 되느냐가 아니고 그날 참석자들의 명단이 없기에 기억을 더듬어가며 길.흉사를 참가하다보니 오해 아닌 곡해가 생기고 생길 수가 있어 고민스럽기가 그지없다. 참으로 안타깝고 마음이 상하는 일이었다.

 

그러기에 이따금 부고장(訃告狀)를 받거나 상가(喪家)에 갈 때면 지난 12년여 전 母親喪事 때 있었던 일로 잊히지 않은 한 고교 동창이자, 동창으로 구성된 모 신앙모임의 일원인 모(某)야의 평소 가식적이고 야비하고 비인간적인 알량한 행태를 알고는 있었지만 이렇게도 섭섭함을 넘어 잊을 수가 없다.

 

사람에게 죽음(死)이란 생각하기도 듣기도 두렵고 무서운 말 중 하나이다, 그러기에 살아 있는 사람에게 죽음은 누구나 가장 두렵고 상상조차 하기 싫은 일이지만, 지구상 존재하는 여느 생명체 중 사람은 유일무이하게 죽음을 미리 상상하거나 예언할 수 있고 그것만으로도 두렵고 무서움을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죽음을 맞닥뜨릴 때까지 까맣게 잊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기에 때로는 죽음을 생각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을 잊으려 노력하기 보다는 언제 닥칠지 모르는 죽음이 삶(인생)의 과정 중 일부로 넣어놓는 것이 죽음을 대처하는 지혜로운 방법일 수도 있다고 하겠다. 그러기에 慶事때보다 상사(喪事)시에 어려움이 많고 복잡하고 많은(複雜多難) 일이 따르기 마련이다.

 

생각하기에 아무리 주고받는 Give & Take인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경조사(慶弔事)가 있을 때 조의금(弔意金)이나 축하금. 위로금 등, 그런 것을 안 따지고 잊고 지낼 때도 있어야 소인배가 아닌 따뜻한 사람이 사는 인간의 참맛. 진솔한 삶의 맛이 나는 것인데, 지나친 이해타산을 하다보면 어느 때인가 자기주위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이 사람이 사는 세상사 이치(理致)인 것을 알아야 하겠다.

 

 

    

 

    

 

 

 

 

 

 

출처 : 벽진산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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