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문. 편지글.

[스크랩] 初八日, 임휴사(臨休寺)를 다녀오며.

碧 珍(日德 靑竹) 2017. 5. 7. 00:46

 

 

 

初八日, 임휴사(臨休寺)를 다녀오며.  

 

 

 

(1).

지난 4월 초순에 하늘 높고 푸르고 벚꽃이 만개한 날 경남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에 있는 쌍계사(雙磎寺)와 전남 구례군 마산면 황전리 지리산(智異山)에 있는 화엄사(華嚴寺) 명부전(冥府殿)에 다녀왔었고, 중순 들어 49제(四九祭)를 지내고 수년간 제사를 모셨던 대구 근교 칠곡 松林寺 명부전을 찾아고, 하순이 되어 천안.아산역에서 그 사람을 만나 장성 백암산 백양사((白巖山 白羊寺) 명부전을 찾은 뒤, 지난 5월3일 음력 사월초여드렛날(初八日)은 이 아해와 그 사람은 대구 앞산(대덕산) 달비골에 있는 임휴사(臨休寺) 찾아 아버님. 어머님을 간절히 그리다 왔었습니다.

 

자연의 섭리대로 해마다 오는 음력사월이 되면 만물이 소생하고 기화요초가 피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初八日이 오며 내 마음에 내 곁에는 부처님만 오시는 게 아니라 외할머님. 아버님. 어머님, 가신님들이 오셔서 모두 함께 이내 가슴에 자리한다, 그러면 님들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하지 못하는 아쉬움으로 山寺를 향합니다.

 

지난 1970년 4월 초순경 이미 수십 년 전 고인이 되신 외할머님을 따라 서부주차장 앞에서 하차한 후, 논두렁 밭두렁 실개천 산길을 지나 앞산(대덕산) 달비골을 향하여 30여분을 걸어 올라가다 대덕산 자락을 올라 도착한 곳이 조그마하고 초라한 암자형 절이 임휴사(臨休寺)로, 나와 임휴사는 이미 45.6년전 인연을 맺었던 것으로 기억을 더듬을 수가 있었기에 이번 初八日에 찾게 되었다.

 

어느새 초여름이 가고 때 이른 한여름이 다가온 듯한 初八日 맑은 아침 산길을 오르니 땀이 흘러내리도록 더웠다, 저만치 산허리에 걸려 있는 흰 구름은 대덕산자락 절집위에 유유히 떠 있고 간간이 바람이 불고 사이사이 햇살이 쨍쨍 비치며, 산 골골마다 시원한 산바람이 불어 절집에는 다소나마 시원한 가운데 초파일 불공 올리려는 신도 도반들로 북적거리니, 부처님의 가피와 은덕이 고적한 절집에 피어올라 덮으니 절집 뒷산에는 솔바람이 일고 소나무 내음이 피어 천년의 그리움 되어 소리 없이 피어오르며 부처님을 그리는 마음으로 자비 행복한 꿈 되어 잠기는 마음이다.

 

불기 2561년 4월 8일, 오늘은 부처님오신 날입니다, 그러나 오늘만 부처님오신 날이 아닙니다, 날, 날마다 부처님오신 날이며, 나의 참 생명과 마주하는 그 순간순간이 바로 부처님이 우리 곁에 오시는 순간인 것입니다, 온갖 번뇌와 괴로움과 집착을 비워 놓아버리고 참나 주인공과 마주하는 순간순간이 부처님이 오신 날이라 하겠습니다.

 

그립고 보고 싶습니다, 외할머님. 아버님. 어머님을 향한 그리움과 아쉬운 마음으로 고희를 지난 지금도 님들의 크고 깊으신 사랑의 족적을 느끼며, 따라 갈 수 없는 무량한 사랑임이 절절히 가슴에 와 닿기에 눈물이 앞을 가리 웁니다. 자식으로 풍수지탄(風樹之嘆)한 마음이다, 효도를 다하지 못한 채 어버이를 여윈 자식으로, 부모가 일찍 돌아가셔서 효도를 할 기회가 없어 한탄스러움이 이렇게도 이 밤에 가슴으로 와 닿아 저며 드는지, 세월이 이러히 흐른 뒤에야 님께서 주신 크나 큰 사랑을 알게 되는 어리석은 아해(兒孩)에게 용서와 사랑을 주시옵기를 염원하며 합장합니다. 아울러 늘 함께하여 주는 그 사람에게도 고마움을 보내는 마음이다.

 

                     부처님의 큰 위신력과 가피로 극락왕생 하옵소서.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으로 극락왕생 하옵소서.

 

                             불기 2561년 初八日 저녁.

                                       臨休寺를 다녀와서 큰 兒孩 合掌 拜.

 

                                대구 앞산 비슬산 진달래

 

* 追記.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 대덕산(앞산) 달비골에 고려 태조 왕건과 관련된 이야기가 담겨져 있는 천년고찰이자 전통사찰로, 신라 경명왕5년(921년)에 영조대사(靈照大師)가 창건하였으며 조선 순조11년(1811년)에 무주선사(棟藪大戰)가 중창하였고, 1930년에 포산화상(苞山和尙)이 3창을 하였으며, 이후 1996년 혜담(慧潭)스님이 법당과 요사를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팔공총림) 말사로 조그마한 임휴사(臨休寺)가 있다.

 

임휴사(臨休寺)가 자리한 대구 앞산(대덕산) 달비골은 수림보호가 잘 되어 있어 등산객들이 많이 찾아오는 곳으로, 이 골짜기에는 특기할만한 문화재는 없으나 절 위쪽 굴속에 위장병에 효험이 있는 석샘과 황룡샘이 있어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곳에는 석두암이라는 암자가 있었고 당시 이 샘의 천장에서는 쌀이 떨어졌는데 행자가 욕심을 부려 부지깽이로 쑤신 뒤 물로 변하였다 한다. 이 약수는 수십년전 위장병으로 고생하던 한 노인에 의하여 발견되었다.

 

임휴사는 지난 2004년 7월 12일에 타종교의 광신도로 추정되는 정체불명의 괴한의 계획적인 방화로 요사채를 제외한 전각이 어처구니없게도 모두 불에 타는 불행한 사건으로 인하여 현존하는 당우대웅전과 나한전 등은 신축한 건물이다.

 

역사적으로 임휴사(臨休寺)는 고려 태조 왕건이 팔공산 동화사 인근지역에서 있었던 동수대전(棟藪大戰)에서 견훤과 싸우다가 대패하고, 견훤의 추격을 피하여 반야월(半夜月)과 은적사에 숨어 있다가, 안일사(安逸寺)를 거쳐 이곳 임휴사 터로 피신 와서 기도를 드리고 安心立命을 찾아 쉬어갔다 하여,임시로 쉬어갔던 절이란 뜻으로 사찰 명을 임휴사(臨休寺)라 하였다고 하며, 임휴사는 태조 왕건이 계속적인 패배로 지친 심신을 부처님 전에 달래어 심기일전하고 다시 전장에서 승리를 하게 된 계기를 마련한 유서 깊은 호국도량이다.

 

 

 

(2). 大邱와 高麗 태조 王建.

 

대구광역시 달서구 상인동의 대덕산 기슭에 자리한 천년고찰 호국도량 임휴사(臨休寺)가 있다, 임휴사(臨休寺)라는 사명(寺名)은 후삼국시대에 백제와 고려의 각축장이 되었던 팔공산 지역에서 고려를 세운 왕건과 후백제의 견훤이 일대 격전을 치른 곳으로 동수대전(棟藪大戰)의 발생에서 찾을 수 있다.

 

서기 927년 후백제의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여 오자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이 신라를 돕고자 경주로 가던 중, 팔공산 동화사 인근지역인 동수에서 견훤을 만나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었던 싸움을 동수대전(棟藪大戰)이라 한다, 이 싸움에서 왕건은 크게 패하여 생명조차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왕건의 심복인 김락의 호위를 받은 신숭겸이 왕건의 투구와 갑옷으로 위장하고 달아나자 견훤이 이를 진짜 왕건으로 보고 쫓아가 죽이는 바람에 왕건은 무사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왕건은 자신을 대신하여 전사한 신숭겸과 김락을 위해 지묘사(智妙寺)를 지어 위로하였는데 지묘사는 후일 없어지고 말았다. 이 동수대전싸움으로 인하여 대구에는 왕건과 관련된 많은 지명이 남게 되었다고 전한다. 즉 왕건은 파군재 일대에서 견훤에 참패하여 겨우 목숨을 건지지만, 대구에는 연경, 무태, 살내, 왕산, 일인석, 시량리, 불로, 해안, 안심, 반야월, 반월당, 안일암, 왕굴, 은적사, 임휴사, 초례봉 등의 많은 지명과 신숭겸장군유적지(순절지지비 등)를 남기었다.

 

대구지역에는 고려(高麗)의 특별한 흔적, 즉 왕건의 발자취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없이 많이 있다, 왕건 군(軍)이 견훤 군에게 부서진(破)고개인 파군재(破軍峙)가 있고, 왕건이 도주하다 혼자(獨) 앉아(坐)있었던 바위(巖)인 독좌암(獨坐巖)이 있고, 양쪽 군사들이 날린 화살(箭)이 강물(灘)처럼 흘러 다닌 시내인 살내(箭灘)가 있고, 왕(王)이 도주할 때 넘은 산인 왕산(王山)이 있으며, 왕이 숨어있던 동굴인 왕굴도 있다.                                 독좌암

 

또 왕건이 직접 이름을 지어 붙였거나 그와 연관하여 동명이 생겨난 곳도 여럿 있다. 불로(不老)동은 노(老)련한 청장년 사내들이 보이지 않는(不) 동네라고, 연경(硏經)동은 선비들이 공부하느라(硏) 책(經) 읽는 소리가 낭랑하다고 왕건이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군사들에게 게으름(怠)이 없어야(無) 한다고 훈시한 무태동(無怠洞), 왕(王)이 없어진(失) 동네라 하여 실왕리(失王里), 어느 정도 멀리 도망을 쳐서 걱정이 줄어들자 굳었던 왕건의 얼굴(顔)이 그제야 풀렸다(解)는 해안(解顔), 마음(心)이 놓였다(安)는 안심(安心), 지나갈 때 반(半) 달(月)이 밤(夜)길을 비추었다는 반야월(半夜月), 당(當)도 했을 때 반(半)달(月)이 떠 있었다는 반월당(半月當) 등은 왕건의 발걸음에서 이름이 연유한다고 전한다.

 

또한 사찰(寺刹)과 서원(書院) 몇 곳의 이름에도 왕건과 관련한 옛일의 연유와 내력이 젖어들어 있다. 왕건이 숨어(隱) 지낸 흔적(跡)이 남은 은적사(隱跡寺), 잠시 머물며(臨) 쉰(休) 임휴사(臨休寺), 안(安)전하고 편안하게(逸) 지낸 안일사(安逸寺), 혼자(獨) 앉아있었던 바위(巖)에서 이름을 따온 독암서원(獨巖書院) 등이 있듯이, 高麗 국은 비록 대구에 많은 유적이나 보물 등을 남기지 않았지만, 태조 왕건은 다른 어느 지역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리만큼 수많은 흔적과 족적을 八公山에서 앞산(대덕산)일대에 많은 족적을 남기었다. 

 

                                 신숭겸 장군 유적지 표충재

 

                 

 

 

 

 

 

출처 : 벽진산방
글쓴이 : 碧珍(日德. 靑竹)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