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었다는 이유로 대우를 받는다는 생각은 착각이다.
우리 지하철이나 버스 내에서 눈을 감거나 폰을 조작하면서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효행(孝行)이나 어른에 대한 공경(恭敬) 및 장유유서(長幼有序), 자리이타(自利利他) 등을 하지 않은 어른들이 하는 것을 보며 배우고,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기에 이는 우리 기성세대, 즉 늙은이들이 그렇게 보여주고 키워 놓았기 때문 아닌가 한다, 좀 지나친 표현일까.
아침저녁 출. 퇴근시간대에 지하철을 타면 아침 무렵에는 잠이 모자라 졸거나 피로한 기색이 역력하고, 저녁 무렵은 피곤이 겹쳐 곤히 자거나 지처서 어깨가 축 늘어져 측은하기 까지 한, 등하교(登下校)하는 학생이나, 출퇴근하는 공원. 공무원, 회사원 그리고 힘든 일을 하는 노동자 등 다양한 사람들이 지하철을 이용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출퇴근시간대 지하철을 보면 무거운 책가방과 부속물을 지닌 학생들이나, 힘든 육체적 노역을 하는 노동자들이나 월급쟁이들은 아침 출근이나 일터로 가는 시간대와, 그들이 퇴근하는 저녁 무렵 시간에는 하루 종일 업무와 노동에 시달려 지치서 힘들어 하며 고달픈 몸으로 귀가하는 모습을 볼 때, 지난 날 출퇴근하던 그 때가 눈에 선하여지며 한편으로는 그 시절이 그립기도하다. 그러기에 가급적이면 사소한 일이나 사적인 일이나 친구나 선배나 옛 직장동료 등과 만날 약속 시간은 학생 노동자들이 출퇴근 시간대에는 가급적이면 피하고 있다.
근래 들어 지하철을 타다보면 할 일없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지나치게 늙은이 행세하거나 나이들은 늙은이들이, 학생이나 봉급생활자.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 양보를 요구하거나 언짢아하는 등 횡포에 가까운 행태를 보면 고희(古稀)를 지난 이 사람 눈에도 그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늙은 사람, 즉 늙은이는 어느 정도 나이를 먹어야 늙은이라라 할 수 있는 것 일까? 하고 자문자답하여보기도 한다.
그러기에 나이가 들어 늙은이가 되었다하여도 서서 갈 수 있는 늙은이들은 자리를 양보 받으려 하지 않아야 하고, 아이들과 등하교 학생. 출퇴근하는 노동자와 봉급생활자 등 앞에 서서 자리 양보를 강요하지도 않아야 하겠으며, 이미 자리에 앉은 늙은이들은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먼저 자리를 양보하여야 하겠는데, 이러한 장면을 보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은 하지 말라 하여도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다.
늙은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예우(禮遇)나 대우(待遇)를 받으려면, 늙은이는 스스로 늙은이는 사람답게 처신하고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나이가 많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담스런 존재가 된지 오래이기에, 우리 사회는 유교국가 시대의 유물인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벌서 사라졌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지난날 대접받던 노인들이 모르는 사이에 한꺼번에 폐기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한 실례로 얼마 전 퇴근시간에 지하철 차내에서 일어난 일로, 남녀 노인들이 지하철을 타자말자 차내를 한번 둘러보더니, 대뜸 노동으로 피로에 찌든 젊은 노동자와 무거운 책가방을 지닌 학생에게 하는 말투가‘요사이 젊은 놈들은 어른을 알아보지 못해, 버릇장머리 없어’하고 젊은이들을 타박하고 나서니, 한 두 사람이 마지못하여 피곤한 몸을 일으키며 자리를 내어 주고는 피로감에 시달리며 서서 졸고 있는 모습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렇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무거운 책가방을 들고 공부하러 가는 학생이나, 노동하러 가는 봉급생활자나 막노동하러가는 노동자. 공원 등이, 출근하는 아침 출근시간대에 지하철 차내에서도 이런 사태가 비번하게 일어나는 일이며, 저녁 퇴근 무렵에도 마찬가지로 일어나는 사연이다.
지나친 기우인가 하지만 문제는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늙은이들은 출근하거나 노동하러 가는 것도 아닌데 무임(공짜)승차를 할 수가 있다하여도, 늙은이들이 늙은이 답지 않게 젊은이들의 출퇴근 시간대에 할 일없이 왜?, 하필이면 지하철을 그 시간대에 타는가 하고 반문하고 싶어진다.
이따금 늙은이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거나 경망스럽게 행동하므로 망신을 당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상황을 잘 살펴보고 그에 알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예의이고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한 사람, 늙은이들이 한발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 것이‘사람의 세상살이 지혜란 무엇일까’의 답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 사람의 수명(壽命)이 100세 시대를 눈앞에 둔 시점이 되었으니 늙은이, 즉 노인은 병들어 시들어 가고 경제적으로 약하여 피부양자 계층으로 보이기 마련이기에 늙은이에 대한 긍정적이고 발전적으로 나이가 들어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심정으로 남은 생(餘生)을 살아간다면 늘그막에 보다 젊게 살아 갈 수가 있겠다.
그러기에 사람의 늙음, 즉 늙은이는 인생길에서 온갖 질곡(桎梏)의 세월을 겪어 온 터라, 아량과 관용이 심연처럼 깊고 충동적이고 자극적인 말을 가릴 줄 알고 하는 지혜로움도 있기 때문에, 여유로움과 느낌의 美學에서 나오는 삶(人生)의 哲學이 보다 아름답기도 한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나 나름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바쁘게 살아가다 보면 벌써 나도‘늙었구나’하는 시기를 만나게 되는데, 우리 사람이 날 때부터 타고난 정하여지고 또는 피할 수 없는 목숨(命)은 숙명적인 일이다.
가정과 사회에서 밀려난 노인들은 공원이나 지하철 역사 공간에서 서성거리는 노인들은, 부모님 모시고 자식들 키우면서 그렇게도 열심히 살아왔건만 어느 날 아들. 며느리나 아내로부터 버림받은 존재가 되어버린 것은 누굴 탓할게 아니라 바로 세월과 자신의 탓이라 하겠다. 즉 눈을 감고서 모르는 척 자리에 앉아 있는 젊은이에게 자리를 양보하여 주기를 바랐던 늙은이들은, 이제 세월과 자신을 한탄할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게 되도록 어느 사이에 세상도 변하였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따금 듣는 말 중에‘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평범한 진리대로 사람은 누구나 늙으며 늙은이가 되는 것이나, 문제는 아름다운 노년을 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늙은이는 되지 못하더라도 추하여지거나 추한 늙은이는 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아름다운 노년이 되려는 노력하여야 하겠다.
우리 사람은, 즉 늙은이가 오래 살아다(長壽)는 것의 의미를 단순이 살았다는 것보다, 어떻게 남은 삶을 지혜롭게 사는가를 심사숙고하며 노년을 보내어야만 늙은이를 예찬(禮讚)할 수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한다.
|
* 追記.
지난 어느 날에는‘노인예찬’에 대하여 몇 자를 적었었는데, 이렇게
늙은이에 대한 서글픈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이도 이제 나이를 들은
반열에 들었나 하고 생각하니 새삼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지는 것을
어이할까 한다.
'정치. 경제. 시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새정치민주연합 고질병, 과연 개조가능 할까. (0) | 2014.08.31 |
---|---|
[스크랩] 애국가 음 낮추기, 누가, 왜, 미친 짖을 하는가?. (0) | 2014.08.31 |
[스크랩] 야당 습관화된 장외투쟁, 국민 불신만 쌓인다. (0) | 2014.08.27 |
[스크랩] 우리 사회지도층도 피지도층 행태도 부끄럽다(2). (0) | 2014.08.27 |
[스크랩] 우리 사회지도층도 피지도층 행태도 부끄럽다(1). (0) | 2014.08.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