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젊은이의 미래라, 과연 말 할 수가 있겠는가(2).
노인을 젊은이의 미래라, 과연 말 할 수가 있겠는가(2).
근래 들어 지하철을 타다보면 공짜라면 양잿물이라도 먹는다는 말처럼 할 일없이 무임승차 지하철을 타고 다니며 지나치게 늙은이 행세하는 노년층들을 많은데, 문제는 이 노년들이 출퇴근 시간대에 학생이나 봉급생활자. 노동자들에게 당연한 듯이 얼굴을 붉히면서 자리 양보를 요구하거나 언짢아하는 등 횡포에 가까운 싸가지 없는 행태를 보면 희수(喜壽)를 지난 이 사람 눈에도 그들이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에 나이가 들어 노년층이라 하여도 서서 갈 수 있는 노년층들은 자리를 양보 받으려 하지 않아야 하고, 아이들과 등하교 학생. 출퇴근하는 노동자와 봉급생활자 등 앞에 서서 자리 양보를 강요하지도 않아야 하겠으며, 이미 자리에 앉은 노년층들이라도 몸이 불편한 사람들에게 먼저 자리를 양보하는 이런 솔선수범하는 장면을 보는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에게는 귀감이 되어 하지 말라 하여도 자리를 양보하게 될 것이다.
되돌아 생각하여보자, 지하철이나 버스 내에서 눈을 감거나 폰을 조작하면서 앉아있는 젊은이들을 많이 볼 수가 있는데, 이는 어릴 때부터 자라면서 효행이나 어른에 대한 공경과 장유유서(長幼有序), 自利利他 등을 행하지 않은 어른들을 보며 배워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이기에, 이는 우리 기성세대인 노년층들이 그렇게 보여주고 키워 놓았기 때문 아닌가 한다, 좀 지나친 표현일까 하나 사실이다.
이따금 노년층들이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거나 경망스럽게 행동하므로 망신을 당하는 사람을 종종 볼 수 있는데, 상황을 잘 살펴보고 그에 알맞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은 바로 예의이고 세상 살아가는 지혜라 할 수 있는데, 이 또한 세상살이를 오래 경험한 사람, 노년층들이 한발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이런‘사람의 세상살이 지혜란 무엇일까’라는 말에 답이 되는 것이라 하겠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하다보니 노년층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예우나 대우를 받으려면 노년층들이 스스로 노년층답게 처신하고 스스로를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나이가 많다는 것이 자랑이 아니라 부담스런 존재가 된지 오래이기에, 우리 사회는 유교국가 시대의 유물인 장유유서(長幼有序)는 벌서 사라진지가 오래다. 시대가 변함에 따라 지난날 대접받던 노년층들은 모르는 사이에 한꺼번에 폐기대상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사람의 늙음, 즉 노년층들은 인생길에서 온갖 질곡의 세월을 겪어 온 터라, 아량과 관용이 심연처럼 깊고 충동적이고 자극적인 말을 가릴 줄 알고 하는 지혜로움도 있기 때문에, 여유로움과 느낌의 미학에서 나오는 삶(人生)의 철학이 보다 아름답기도 하다, 우리가 이따금 듣는 말 중‘노인은 젊은이의 미래’라는 평범한 진리대로 사람은 누구나 늙으며 노년층들이 되는 것이다.
문제는 아름다운 노년을 살기가 참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노년은 되지 못하더라도 추하여지거나 추한 노년은 되지 말아야 하겠기에 아름다운 노년이 되려는 노력하여야 하겠다. 즉 노년이 오래 살아다(長壽)는 것의 의미를 단순이 살았다는 것보다, 어떻게 남은 삶을 지혜롭게 사는가를 심사숙고하며 노년을 보내어야만 노년을 예찬할 수가 있는 것이 세상의 이치가 아닌가 하며, 노년이 되었다는 이유로 예우를 받는다는 생각은 착각 중 착각이 아닌가 한다.
‘ 不失其所者久(불실기소자구) /제자리를 잃지 않은 자가 오래가고 死而不忘者壽(사이불망자수) /죽어도 잊어지지 않은 자가 오래 산다.’고 老子 道德經 33장에 있는 말씀이 생각나 다시 적어본다.
위 글은 읽고 음미하다보면, 만족함을 아는 것은 넉넉하고 여유가 있지만, 억지로 힘써서 행하는 것은 뜻을 이루고자 하는 생각만 있는 것이며, 道의 본래 그 자리를 잃지 않는 것이 영구히 존재하는 것이며, 육체는 죽을지라도, 그러나 없어지지 않는 道는 오래 장수하는 것을 말하고 있음이 아닌가 한다.
* 追記. 지난 어느 날에는‘노인예찬’에 대하여 몇 자를 적었었는데, 이렇게 늙은이에 대한 서글픈 글을 쓰다 보니 글 쓰는 이도 이제 나이를 들은 반열에 들었나 하고 생각하니, 새삼 떠오르는 생각들이 많아지는 것을 어이할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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