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산문. 편지글.

[스크랩] 나를 있게 하여주신 우리 선생님, 李吉雨 선생님.

碧 珍(日德 靑竹) 2017. 6. 2. 17:30

 

 

 

나를 있게 하여주신 우리 선생님, 李吉雨 선생님.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면서 넓은 마음을 가지고 큰 생각을 하며 성장하도록 가정에서는 부모님은 면학(勉學)하기를 권하고, 배우는 곳인 학교에서는 스승님께서는 젊은 시절 부지런히 학문을 닦아 동량(棟樑)이 되라 하시고, 국가사회는 그러한 인재(人材)를 요구하고 있는 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한해살이풀인 쪽(대청)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 쪽보다 더 푸르다고 비유되는 청출어람(靑出於藍) 5월 스승의 은혜를 감사하는 스승의 달을 맞아, 늘 웃음을 머금고 카랑카랑하신 말씀에다 열정과 크신 사랑, 올곧은 가르침을 주시었고, 특히 사제(師弟)사이 인연으로 慶北中 3학년시절 담임선생이셨던 李吉雨 선생님과 선생님 댁에서 2년여를 기거하였던 삶과, 더불어 선생님의 전매품인탈곡 도리깨용 물푸레나무 긴 가지 마디를 깎아 만든 회초리(매)를 들고 다니시던 모습에다, 60여 급우들의 돌방돌방 한 얼굴들이 새삼 떠오르며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그때가 그 시절이 그립고 아쉽기만 하다.

 

사람은 태어나 숨을 쉬는 순간부터 부모님과 스승님(恩師)과 더불어 세상 모든 존재하거나 하지 않은 것과도 인연을 가지고 세상에 왔다. 그러기에 세상사 인간사에서 가장 힘이 드는 것이 사람과 사람의 관계이다, 그런데 나(我), 과연 혼자서 이 세상에서 단 하루라도 살아 갈 수가 있었을까, 아니 없었기에 인생사에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 스승님과 부모님과의 인연은 무엇보다 중한 인연이다.

 

사람이 태어나 만나는 3가지 복 중, 첫째가 父母님과 만남이고, 둘째가 스승(Mentor)님과 만남이며, 셋째가 배우자와 만남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스승님의 은혜는 하늘같다고 하였는데 주희(朱熹) 선생은 四字小學에서,

 

   能孝能悌 莫非師恩(능효능제 막비사은) / 부모님께 효도하고 웃어른을

                       공경할수 있는 것은 스승의 은혜 아닌 것이 없느니라. 

   能知能行 總是師功(능지능행 총시사공) / 알 수 있고 행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승의 공이니라.

라고 적고 있듯이,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는 말이 새롭게 다가온다.

 

한 생을 살아오는 동안 주위에서 함께 머물러 주셨던 선배 친구 등 그 모두가 은인이었고 가르침을 주신 恩師이었음을 늘 감사하게 생각하며, 특히 慶北中 3학년시절 담임이신 李吉雨 선생님과는 잊을 수가 없는 인연이었다.

 

李吉雨 선생님과는 慶北中學 3학년이 되면서 1반에 배정되므로 첫 인연이 이루어 졌었다, 3학년 1반에 배정 받은 첫날 담임으로 인사 말씀을 하시고 난 뒤 출석부를 보면서 한 사람씩 호명하여 대답하는 음성을 들으시고 일어서게 한 후 얼굴을 익히기를 마치는 식으로 첫 대면을 하였다. 그런대 다음날 수학시간이 되자 출석부 없이 5분여 일찍 오셔서 1번부터 눈을 감으시고 호명하기 시작하였는데, 마침 한 급우가 대리로 답하자 즉각 눈을 뜨시고 호되게 꾸중을 하셔서 급우들은 아연 긴장하게 되었고, 그 다음날부터는 1년 내내 대리 출석과 대리 대답은 없어졌던 일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된다.

 

세월이 흘러 古稀를 훨씬 넘긴 나이에도 慶北中 3학년부터 高 2학년을 올라가던 날까지 2년여 선생님 댁에 기거하며 살아온 세월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李吉雨 선생님은 학교에서는 엄하였으나 집에서는 조용하시고 넉넉하시며 인자하신 한 필부(匹婦)의 남편이시며 한 딸아이의 아버지이시었다, 선생님께서는 술을 하시지 않는다, 그래서 사모님께서는 늘 과일. 떡이 아니면 찐빵이나 삶은 감자. 고구마를 준비하여 두시기에 그 덕분에 자주 얻어먹게 되었고, 또한 사모님께서 좋아하시던 멍게를 그 때 난생 처음으로 먹게 되었던 즐거웠던 추억들도 있다.

 

恩師 李吉雨 선생님 댁은 삼덕동 있는 적산가옥으로 선생님 댁으로 입주하니 골목 첫 집은 음악선생님 댁. 백경기 교감 선생님 댁. 넷째 집은 김달생 상업선생님 댁이라, 다음날부터 우리 선생님과 내 점심.저녁 도시락 4개, 이웃 선생님 점심 도시락 3개를 들고 다니는 곤욕?을 치르게 되었는데, 마침 교무실로 갖다 드리기 전에 급우들이 장난삼아 자주 훔쳐 먹었기 때문에 불행 중 다행으로 도시락 보급 임무는 벗어나게 되었던 episode(逸話)도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恩師 李吉雨 선생님은 진정 독실한 在家 참 佛者이시다, 선생님 댁에 입주한 다음날 새벽에 다다미(돗짚요)를 깐 거실에서 불경 독송(讀誦)하는 소리를 듣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지금 내가 하는 것과 다름없이 새벽禮佛을 올리시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데 다음날 새벽 늦게까지 잠을 자고 있는데 물 폭탄을 맡았다. 그 이후로 적어도 새벽 5시 반까지 책상에 앉아 있지 않으면 어김없이 한 겨울에도 찬물세례 받았다. 인자하신 선생님의 큰 사랑 덕에 오늘날까지 한 생을 네댓 시간이상 잠을 자본일이 없는 습성을 가지게 되어 삶에서 큰 도움이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겨울 여름 등 계절을 불문하고 새벽예불을 마칠 때까지 즉, 새벽 5시 반까지 책상에 앉지 않고 잠자리에 있으면 이불을 들고 한 바께쓰(양동이) 찬물을 덮어씌우던 일과, 그리고 나면 매번 찬물에 적셔진 이부자리를 세탁하고 풀 먹여 다림질하셔야 하였던 師母님의 노고에 미안한 마음보다 고마움에 늘 감사하는 마음에 일찍 일어나던 그 때가 눈에 선하다.

 

은사 李吉雨 선생님의 도리깨용 물푸레나무 긴 회초리는 우리 3학년 1반 급우들이 공포의 대상이자 친숙하지 않을 수가 없었던 회초리로, 하양.반야월과 경산.청도 방향에서 등교하는 급우가 교대로 학급비로 구입하여 오면, 그날로 주번 2명이 채벌로 종아리나 손바닥을 맞아도 상처가 나지 않도록 거칠거칠하지 않고 매끄럽게 1.2개씩 책임지고 마디마디를 깎아 만든 고귀한 회초리로, 우리 급우에게는 수학시간마다 한 두 차례 맞이하는 희비애환의 많은 추억과 웃음을 준 막역한 친구이자 우리 은사 선생님의 分身이었다.

 

오늘날 나를 있도록 자람과 인격 형성에 있어서 사랑으로 보살펴 주시고, 가르침에 열과 성을 다하여 헌신적으로 베풀어 주신분이 부모님과 李吉雨 스승님이시다, 때로는 회초리로 때로는 엄하고 온유한 말씀으로 밝은 미소로 가르치고 깨우쳐 주신 분들이시다. 사람으로 은혜에 감사하는 것은 사람으로 하여야할 근본도리를 하는 것이다.

 

돌이켜보면 청운의 꿈을 가슴에 품고 인생에서 가장 때 묻지 않고 좋은 시절인 10대에 대봉동 慶北中學 교문을 들어서 교실에서 운동장에서 뛰어놀던 그 시절이 엊그제 같이 아련히 떠오르는데, 이미 고희를 넘기고 흘러간 세월을 잠시나마 잊고 1950년 후반 그 때가 생각나며 까까머리에 白三線을 두른 모자와 소매에 白三線을 한 교복을 단정하게 입었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慶北中(高)은 대구.경북 첫 근대학교로 1899년(대한제국 광무3년)설립하였으니 올해로 118년을 맞은 모교이다.

 

우매하고 작은 제자 기억에 스쳐 지나가는 선생님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에 이르기까지 나를 가르쳐 주신 수많은 선생님들이 있으나, 그 많은 선생님들 중에서 참 스승을 꼽으라면 내 마음에 각인되어 있는 분은 늘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게 부모님에게 효도라고 하신 慶北中學 3학년시절 담임이신 李吉雨 선생님이시다. 이따금 선생님의 그 말씀이 생생하게 귓전을 맴돌고 있답니다. 지금은 목이 메도록 아무리 크게 불러보아도 대답이 없는 그리운 李吉雨 선생님이시다, 우매한 작은 제자를 훈육하신 선생님 한분 한분이 모두 기라성같이 훌륭한 분들 이셨지만 李吉雨 선생님은 가히 그중에서도 단연 백미(白眉)이셨다. 늘 우러러 존경하였습니다.

 

   그리운 선생님, 부처님의 가피력으로 極樂往生 하옵소서.

   대원본존 지장보살님의 위신력으로 極樂往生 하시옵소서.

   그리운 李吉雨 선생님, 極樂往生 두 손 모아 祝願합니다.

 

 

                                       어리고 어리석은 제자 광세 올립니다.

 

 

위대한 약속

 

 

 

 

출처 : 벽진산방
글쓴이 : 碧珍(日德. 靑竹)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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